스포 있음
어떤 것의 부재를 새삼 느낀다는 건 평소 그것이 가까웠다는 것의 방증이다. 어떤 이의 부재를 느끼게 된 후 꺼이꺼이 울게 된다면 그건 그를 사랑했다는 걸 의미한다. 부재의 인식은 사랑의 인식이기도 하다. 가득했던 시절은 텅 빈 시절 덕분에 실감할 수 있으며, 반대로 텅 빈 공간을 묘사하는 방법은 가득 찬 시절을 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룩백은 절절한 사랑의 연가이다. 후지노는 자신이 쿄모토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쿄모토가 죽고 나서야 깨닫는다. '나 없인 아무것도 못할걸.' 자신의 곁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려던 쿄모토에게 겁박하듯 후지노가 한 말은, '넌 내 부재를 절감하게 될 거.'라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실상은 반대였다. 후지노는 교모토의 부재를 절감하게 된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둘이 함께 만화를 그리던 시절은, 추억의 장면이면서 후지노, 쿄모토의 사랑의 증거들 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탁월한 점은 그 둘 사이의 실제뿐만 아닌, 상상으로 그려낸 '가득 찬 시절'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후지노가 쿄모토를 방에서 꺼내지 않았을 경우, 즉 죽음을 겪지 않았을 때 함께 했을 가득 찬 시절을 상상함으로써 쿄모토가 없어진 텅 빈 시절을 분명히 그린다. 이 영화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한 가지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 하나의 정서를 위해 정반대 두 길을 동시에 걷는다. 정말로 함께 했던 시절, 그리고 함께 할 수도 있던 시절. 둘 중 어떤 길을 걷다 하더라도 당신의 부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될 때 후지노의 사랑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후지노는 쿄모토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한다. 어니 어쩌면 둘은 한 몸이었는지도 모른다. 후지노 쿄라는 필명도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름을 반씩 섞어서 만든 하나의 이름 아닌가. 이야기와 그림, 인물과 배경, 스토리와 분위기, 펜을 쥔 왼손과 오른손... 어쩌면 하나였던 둘은 만화라는 프리즘 앞에서 둘로 나뉘었는지 모른다.
둘이 한 몸이었다면 앙상한 나무를 사이에 두고 일어났던 둘의 갈등은 후지노의 과거와 미래 사이의 갈등일 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혹은 그림 그리는 것 자체로 순수하게 즐거움을 느끼던 어린 날의 시절에서, 어떤 사정에서든 이야기를 쌓아가고 그림을 완성해야 나가는 프로의 시절로 나아가기 위한 내적 분투의 현장으로 보인다. 밖에 나가길 두려워하고 안에 머물고 싶어 하며 중심이 아닌 곳에 안주하고 싶은 쿄모토는 후지노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이지만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죽여야 하는 내면의 일부일 수도 있다.
'룩 백'이라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 본다. '룩 백'은 후지노의 뒤를 따라다니던 쿄모토를 돌아본다는 의미일 수도, 함께 했던 즐거운 시절을 돌이켜본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자신의 등을 본다는 의미일 수 있다. 내 등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 유일하게 내 자신이 확인할 수 없는 신체가 내 등 아닌가. 등은 내 몸이면서도 내 몸이 아닌 기묘한 존재이다. 내 등을 인식할 수 있는 건 오히려 내 등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볼 수 없었던 내 모습, 어쩌면 그건 쿄모토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잔혹한 성장담일 수도 있다. 내 안의 수많은 나를 하나씩 죽여가면서 한 시절로 넘어가는 이야기다. 후지노는 어른이 돼 버렸고 죽은 교모토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림으로 쿄모토를 되살려보지만 결국 부재가 명료해질 뿐이다. 지난날들을 그리워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환영으로 채운 부재 안에 머물려 하는 건 순수가 아닌 퇴행이다. 넘어간 장면을 뒤로 돌이킬 수 없는 오래된 게임 화면처럼 결국 지나간 빈 공간을 견디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바로 성장이다. 내 안의 나를 죽여낸 후지노는 텅 빈 공간을 감싸 안고 계속 그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