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닉스 '데뷔에서 Holy Bible까지' Pt.1

by 김성대

매닉 스트리스 프리처스매닉스가 태어난 사우스 웨일스 골짜기 마을 블랙우드Blackwood. 그들이 자란 이 탄광촌은 이제 유명한 경공업, 하이테크 산업지가 됐다. 다섯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제임스James Dean Bradfield와 니키Nicky Wire를 중심으로 매닉스 멤버 네 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하며 뛰어놀았다. 중학생이 되어선 제임스의 사촌인 션Sean Moore의 방에 모여 실없는 농담부터 음악, 문학, 영화, TV와 스포츠, 철학과 정치 이야기까지 두루 나눈다. 특히 문학과 철학, 정치 쪽엔 니키와 리치Richey Edwards가 일가견이 있었다. 둘은 나중 매닉스의 메인 작사가로 성장한다.


록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한 넷은 포스트 펑크와 인디 팝록 쪽으로 기울었다. 특히 밴드의 메인 송라이터가 될 제임스는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나 건스 앤 로지스, 하노이 록스와 에코 앤 더 버니멘 정도를 빼곤 동시대 음악가, 밴드들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필연적으로 시대를 거슬러 가야 했고 그 과정에서 후The Who와 롤링 스톤스, 피스톨스Sex Pistols와 클래시를 만났다. 그렇게 10대 중반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한 제임스에게 니키가 직접 쓴 시를 건네며 매닉스의 송라이팅은 발을 뗀다. 다재다능한 션이 거기에 리듬을 더하며 밴드 형태를 갖춘 건 1986년. TV로 본 펑크 10주년 다큐멘터리 중 클래시, 섹스 피스톨스가 무대에서 뿜어낸 거칠고 생생한 힘과 정신spirit에 계시를 받은 이들은 결국 펑크 록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의 롤모델은 멤버 모두가 좋아했던 후와 초기 롤링 스톤스, 클래시였다. 자동차에 여자들을 태워 선셋 대로를 달리는 80년대 헤어 메탈은 거기에서 배제했지만 건스 앤 로지스만은 예외였다. 팀 내 역할은 제임스가 보컬과 기타를 맡고 션이 드럼을, 니키가 리듬 기타를 쳤다. 베이스는 플리커라는 친구가 잡으며 4인조를 완성시켰다. 스완지 대학Swansea University에 갈 예정이던 리치는 악기 연주가 서툴러 이때는 함께 하지 않았다.

작곡은 션을 중심으로 제임스가 함께 하는 형태로, 노랫말은 니키가 썼다. 구색을 갖춘 밴드는 건스 앤 로지스의 <It's So Easy>를 연습하며 실력을 키워 나갔다. 노랫말은 이후 매닉스와 정반대 성향이되, 곡이 가진 느낌은 밴드로서 매닉스의 정체성과 잘 어울렸다. 그래서 <It's So Easy>는 나중 매닉스의 싱글에까지 들어간다.


밴드 활동비는 공무원으로서 유일하게 고정급을 받던 션의 몫이었다. 마을은 공허한 파업 투쟁, 탄광 폐쇄가 잇따르면서 쇠퇴해갔고, 때문에 10대들을 위한 오락거리가 손에 꼽을 정도였던 환경에서 밴드 활동은 저들이 좌절감을 발산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제임스는 이때 블랙우드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웨일스 수도 카디프의 길목에서 버스킹을 시작했다. '블루 제너레이션Blue Geberation', '베티 블루Betty Blue' 같은, 당초 구상하던 밴드 이름 후보가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Manic Street Preachers=광기 어린 길거리 전도사로 굳은 건 이때 행인들이 붙여준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렇게 1986년 초부터 현지에서 오리지널과 커버섹스 피스톨스, 언더톤스, 지저스 앤 메리 체인 따위를 섞어 라이브를 시작한 이들은 이듬해 여름, 제임스가 기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성 보컬을 영입해보기도 하지만 3개월 만에 없었던 일이 된다. 미국 하드코어 펑크와 헤비메탈 쪽으로 관심을 돌린 플리커도 음악 성향 차이로 1988년도에 밴드를 나갔다. 플리커의 베이스를 니키가 잡으며 3인조가 된 매닉스는 데모를 만들기 시작, 마침내 같은 해 6월 첫 자체 제작 싱글 <Suicide Alley>를 발표한다.


매닉스suicidealley.jpg
클래시.jpg
매닉스가 스스로 만든 데뷔 싱글 <Suicide Alley>의 재킷 사진은 클래시 데뷔작(오른쪽)을 오마주 한 것이다. 리치의 아이디어였다.



이즈음 매닉스의 핵심 작사가가 될 리치가 밴드에 조금씩 스민다. 제임스가 바bar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고, 니키가 리치와 같은 대학에 입학한 시기였다. 니키와 리치는 룸메이트가 된다. 둘이 함께 노랫말을 짓는 건 그래서 자연스러웠다. 리치는 다른 일도 많이 했다. 멤버 중 유일하게 운전면허를 갖고 있어 로디 역할을 맡은 한편 밴드와 싱글 홍보까지 담당, 직접 쓴 소개글을 첨부해 여러 레이블과 음악 관계자들에게 보냈다. 리듬 기타리스트로서 무대에 선 경험을 바탕으로 8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매닉스의 리듬 기타를 잡은 건 물론이다. 팬들이 아는 매닉스의 완전체가 그렇게 꾸려졌다.


매닉스가 음악 매체 기자들 눈길을 끈 계기는 89년 9월, 카디프에서 차로 약 3시간 거리에 있는 런던 공연이었다. 이듬해 3월에는 두 팬진 『호플리스 디보티드Hopelessly Devoted』와 『골드마이닝Goldmining』에 곡 <UK Channel Boredom>을 부록으로 제공, 펑크계 신진 레이블 데미지드 굿즈Damaged Goods와 단발 계약까지 성사시킨다. 밴드의 미래가 밝아진 건 같은 해 6월에 EP 《new art riot》을 발매하면서였다. 이 EP를 내고 매니지먼트 회사 홀 오어 낫씽Hall or Nothing의 대표 필립 홀Philip Hall의 눈에 띈 것이다. 필립은 스톤 로지스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매닉스ep.JPG 매닉스의 앞길을 터준 EP 《new art riot》.


매니저인 필립의 신혼집에서 하숙을 전제로 런던에 올라온 이들은 곧 유력 인디 레이블 헤븐리Heavenly Recordings와 계약을 맺고 91년 1월 싱글 <Motown Junk>를 발매했다. 해당 싱글에 각 음악지들이 호평을 던져 <Motown Junk>는 당시로선 괜찮은 성적인 영국 차트 94위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엔 이들의 초기 대표곡 <You Love Us>를 내놓고 같은 차트 62위까지 올랐다.

이 시기 제임스는 기타리스트로서 자신을 직관적이라고 여겼다. 곡 자체에 존경심을 갖고 연주하려 했다는 그의 관심은 오직 팀이 가진 감정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좋은 곡을 쓰는 거였다. 기교나 연주 속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시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음악과 패션, 호언장담, 그리고 매드체스터에서 슈게이즈까지 당시 영국 음악 신의 모든 유행에 신랄한 조롱리치는 "히틀러보다 슬로다이브Slowdive가 싫다"고 말했다을 퍼부은 그들은 음악 미디어들로부터 조금씩 주목을 받으며 마니아 팬덤을 얻기 시작했다. 밴드는 주위에 영합, 아첨하지 않고 세계를 적으로 돌린다는 자세를 앞세워 라이브에서도 앙코르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4REAL 사건'이 터진다. 때는 1991년 5월. 공연을 마치고 당시 『NME』 기자였던 음악 저널리스트이자 BBC 라디오 DJ 스티브 라마크Steve Lamacq와 리치 사이 말싸움이 붙었다. 라마크는 매닉스의 구호나 외모, 행동을 사람들이 잔꾀로 받아들인다며 리치를 도발했다. 리치는 아니라고 했지만 라마크의 의심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더 반박해봤자 논쟁이 끝나지 않으리라 느낀 리치는 가까이 있던 면도날로 자신의 팔에 '4REALfor real=진심'을 새겨나갔다. 상대에게 폭력을 쓰는 대신,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리치는 그대로 병원에 실려가 17바늘을 꿰맸다.

이 소동이 크게 보도되면서 매닉스의 지명도는 급상승했고, 사건 6일 뒤 소니Sony Music Entertainment 계열의 컬럼비아Columbia Records와 앨범 10장을 계약했다. 매닉스는 데뷔작 제작에 들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디 앤절로의 세 번째 마스터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