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펑크' 위댄스
나에게 위댄스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자유롭다'는 표현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정작 지금 내가 정말로 '자유로운가' 따져봤을 때 거기엔 현실의 무게감 또는 의무감에 짓눌린 물음표 하나가 덩그러니 남게 마련이다. 그게 다 생각이 많고 걱정이 많고, 사회와 조직으로부터 부여받은 역할이 많아서다. 그런 면에서 위댄스는 자유롭다. 일단 팀 이름부터가 그렇다. 위댄스는 말 그대로 "우리는(We) 춤을 춘다(Dance)"는 뜻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춤을 추며 경계를 넘어"가겠다는 의지다. 멤버 이름은 더 단순해 '위'댄스에서 '기'타를 쳐서 위기(기타)이고 '위'댄스에서 '보'컬을 맡아 위보(보컬)라 부른다. 남들 다 하는 쉬운 것과 흔한 것 대신 실험적이고 능동적인 것에 늘 목마른 이들은 2021년 10월 "수레에 실린 기타 앰프를 무대 삼은" 농막 스테이지와 "빨주노초 공사장 조명 아래 나뭇가지로 심벌을 후려"친 비닐하우스 스테이지에서 전대미문의 공연을 펼쳐 음반으로 냈다. 나는 그런 위댄스를 '두발의 자유'라는 곡을 통해 처음 알았다. '두발의 자유'는 듀오가 2013년에 발표한 앨범 'Produce Unfixed Vol.1'의 첫 곡이었다.
지금 난 분명히 두 발로 걷고 있을 텐데 / 어떤 땐 내가 마치 떠다니는 것 같고 그래 / 지금 난 분명히 너를 보고 있을 텐데 / 어떤 땐 내가 마치 유령인 거 같아 보이오 / 두발의 자유, 두발의 자유는 / 시행된 지가 오랜데 왜 이 두 발은 아직 / 자유롭지 못하나
가사는 이게 전부다. 나머지는 위기의 매서운 펑키 기타와 김간지(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드럼, 베이스와 편곡을 맡은 박열(pigibit5)이 채운다. 물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해서 위보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연주가 거칠게 뒤척이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자유의 몸짓을 불사른다. 그렇게 군사 독재 시절의 억압적 단어('두발')와 그 억압을 거부하는 해방적 단어('자유')를 나란히 세워 자신들의 음악 철학을 들려준 이들의 등장은 나에겐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시티펑크'는 그런 위댄스가 '그저 하고 싶다는'에 이어 정식 온라인 음원으로 선보인 두 번째 싱글이었다. 2020년 5월과 6월에 각각 내놓은 이 싱글들은 그해 7월 'Dance Pop'이라는 제목을 단 정규 앨범에 포함돼 대중 앞에 공개됐다. 이 앨범의 제목 역시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방식으로 '댄스 팝'을 들려주겠다는 뜻이었을 뿐이다. 처음 이 앨범을 듣고 나는 이렇게 썼다.
'눈에 뵈는 게 없'이 '그저 하고 싶'은 걸 하는 걸로 치면 70년대 산울림, 90년대 삐삐밴드 못지 않은 이들의 느리지만 꾸준한 행보는 2020년대 대한민국 인디 음악계 시작을 마주한 리스너들에게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베토벤과 라이드(Ride), 페이브먼트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을 들으며 넘은 동부5고개에서 그들이 어떤 음악을 얻어왔는지 당신도 꼭 확인 해보길 바란다
'시티펑크'는 '아이러니즘'과 함께 앨범 'Dance Pop'의 타이틀곡이었다. 억누르고 숨겨 왔던 내 안의 모습, 그러니까 "나의 나 아닌 나, 너의 너 아닌 너"를 벗어던지고 '진짜 나'를 이끌어 내보자는 것이 위보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골자다. 두꺼운 신스 루프와 나른한 기타 리프, 두서없는 위보의 노래가 한데 엉겨 이들의 음악은 기어이 "실험적이고 능동적인" 무엇으로 요동 치며 자신들의 예술적 토양에 자유의 깃발 하나를 더 꽂는다.
특히 이 곡은 뮤직비디오가 재미있는데 "행동을 보면 그것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는 뜻으로 '견행생심(見行生心)'을 들어 "행동을 부추기는 볼거리 역시 필요"하다는 자신들의 평소 생각을 영상에 담았다. 그것은 음악의 펑크(Funk)로 행동의 펑크(Punk)를 이끌어낸 장르의 변종이자 '억눌린 것들의 근본적인 해방'을 지향하는 위댄스의 예술적 실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