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중희 Aug 01. 2017

하와이안 셔츠, 비치 보이스

해변은 상상, 도시는 현실.

내리쬐는 태양. 모래마저 눈부신 찬란한 해변. 크고 아름답게 솟아 휜 야자수. 비키니 차림의 늘씬한 여자들.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바다. 높게 치솟다가 이내 부서지는 파도.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비치 보이스의 ‘서핑 유에스에이’. 너무 작위적인가? 뭐 어떠랴. 언젠가 보냈던 황금빛 해변의 모습이다. 너무 완벽해서 부서질까 두려운 꿈 같은 날이었다. 나는 빈티지 포르쉐 911과 할리 데이비슨이 반복적으로 어지럽게 그려진 빨간색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있었다. 혹시나 포르쉐와 할리가 정면충돌이라도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스스로 귀엽게 느껴져 샀던 이름 모를 브랜드의 그것. 팬츠는 까슬한 감촉의 미색 7부 리넨 팬츠를 입었던 것 같고. <스카페이스>의 알 파치노를 따라 하고픈 마음이 컸던 것이리라. 나름대로 꽤 흡족했었던가. 애석하게도 그 이후로 하와이언 셔츠를 입어본 적 없다. 한여름에 떠난 동남아의 여유로운 휴양지에서도, 동해와 제주도에 서핑하러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요란한 그림과 부담스러운 색상 때문이었겠지.


그런데도 이따금씩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도그타운의 제왕들>에서 그린 스테이시 퍼렐타의 모습에 반해서일까. 단추를 모두 풀고 헐렁한 스윔 팬츠를 입고서 레이밴을 콧등에 얹는 게 멋스럽다는 건 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고. 서핑을 끝내고 물에 젖은 몸 위로 툭하니 하와이언 셔츠를 걸치는 남자를 하와이 노스쇼어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천천히 슬로모션으로 보일 정도로 너무 우아해서 같은 남자가 봐도 멋스러웠달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블레이크 라이블리 주연의 <파괴자들>을 보았나? 테일러 키치가 입었던 빨간색 하와이언 셔츠만큼 그토록 근사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셔츠를 입고 침대 위에서 뒹굴 때 웃음이 나지 않았던 것도? 여자친구를 구하러 갈 때 입은 빈티지한 하와이언 셔츠 역시?

그래. 뜨거운 여름의 해변만큼 하와이언 셔츠가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어울리지 않는 곳은? 신물이 날 정도로 많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의 여름은 하와이언 셔츠로 그득하다. 해변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에 꺼내 입었을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후덥지근한 공기 때문에 짜증 섞인 기분을 마인드 컨트롤해보려는 마음에서일지도. 저 멀리서 다가오는 요란한 형형색색의 셔츠가 괜스레 반가운 것은 이 열기로 가득한 도시에서 잠시나마 근사한 해변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일 거다. 하와이언 셔츠는 기대 보상과 치유의 효과를 지닌 마법의 물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실제로 해변에서 하와이언 셔츠를 마주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바다를 찍는 그레이 말린의 사진 속에는 월리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정도로 숨어 있다. 연출 없이 있는 그대로 찍었을 뿐인데. 그 많던 하와이언 셔츠는 모두 어디로 갔나. 6월인가 7월인가 캘리포니아 1번 도로를 따라 여행했다는 친구는 스투시 티셔츠나 슬리브리스를 더 많이 봤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나 사진 속에서 구릿빛 피부를 뽐내던 싱그러운 미소를 지닌 매력적인 남녀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저물어가는 석양 앞에서 맥주 캔이나 홀짝거리던 모습을 더욱 자주 목격했다고. 그렇다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따라 늘어선 서핑숍에 걸린 그것들은 대체 누가 사가는 걸까? 사서 어디에서 입는 걸까? 휴가를 끝낸 뒤에 돌아간 도시에서?


꽤 친분이 두터운 한 포토그래퍼는 여름이면 하와이언 셔츠를 입는다. 몇 번인가 놀러 간 그의 집 옷방 한켠을 그득하게 채운 그것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긴, 몇 년간 여름에 그가 다른 옷을 입는 것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커피를 홀짝이며 왜 하와이언 셔츠를 입느냐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굳이 바다를 찾아 떠나지 않아도 항상 해변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라고 한다. 3일 연달아 봤는데 모두 다른 셔츠를 입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제법 두툼한 몸, 야자수 그림이 무척이나 조화롭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멋스럽진 않아도. 집에 돌아와 옷장을 뒤졌다. 예전에 산 포르쉐와 할리 데이비슨이 그려진 빨간색 하와이언 셔츠가 튀어나왔고, 괌에서 산 노란색의 그것과 스투시, 헤리티지 플로스, H&M과 자라 등에서 산 녀석들도 함께였다. 거울 앞에 서서 반바지를 대충 걸치고 단추를 하나씩 채워 본다. <비트>의 정우성을 머릿속으로 그렸는데 현실은 처참 그 자체. 반바지를 벗고 즐겨 입는 검은색 꼼데가르송 팬츠를 다시 입은 다음 벨트를 해봤다. 피식 웃음이 나는 게 꼭 마치 시골 건달 같다. 영화 <신세계>에서 젊은 시절 황정민의 건들한 매력이 묻어났던가. 그냥 찌질한 매력인가. 유행을 생각하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이번 여름엔 하와이언 셔츠를 제대로 한 번 입어보련다. 출근할 때도,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도, 서핑하러 바다로 떠날 때도 말이다. 뜨거운 태양만 있고 에메랄드빛 바다와 흥겨운 음악이 없어도 괜찮다. 기분이라도 내련다. 요란한 그림과 부담스러운 색상도 스테이시 퍼렐타는 근사하게 소화하지 않았나. 테일러 키치처럼 탄탄한 근육질 몸매와는 거리가 멀지만 뭐 어때.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옷을 입은 채 사랑을 나누던데, 그런 거라면 나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 있으니까. 상상해본다. 서프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단추를 하나씩 푼 다음 셔츠를 휙 던져버리고 바다에 뛰어든다. 물에서 나온 뒤에는 물을 뚝뚝 흘리며 셔츠를 집어 들곤 모래를 툭 털어낸 뒤에 걸친다. 단추는 안 채워야지. 이왕이면 한국 대신 캘리포니아 1번 도로 어딘가의 한적한 해변에서. 비록 현실이 꽉 막힌 강변북로 어디쯤이라도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스피커에서 흥겨운 서프 뮤직이 흘러나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 대리만족이로군. 하와이언 셔츠가 해변보다 도시에 그득한 이유를 인제야 알겠다.


글 & 사진 최중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