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기 #8. 엄마 생각
저녁이 되니, 트리니닷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메인 광장에 위치한 바의 야외무대에서 살사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메인 무대의 공연과 공연장 앞에 나와 살사 춤을 추는 관광객들을 구경할 수 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이 되자 마을에 있는 관광객들은 그 광경을 보기 위해 하나 둘 메인 광장으로 몰려왔다. 우리도 광장으로 나갔다. 일단 저녁을 먹고 공연을 구경하기로 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분위기가 가장 좋아 보이는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아름드리나무가 우리 자리 위를 채우고 있었고, 나뭇가지에는 크리스마스 조명 같은 오렌지색 전구 장식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원의 풍경과 공기의 온도가 어우러져 야외 파티에 온 듯한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분위기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건너편 자리에 앉아 식사 중인 노부부가 보였다. 단둘이 여행을 오신 모양이었다. 두 분 옆으로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군데군데 이름을 알 수 없는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백발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해 사진을 찍어주고 계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응시하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는 표정을 따라 자연스러운 주름이 피어났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눈가에 피어난 주름마저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고, 셔터를 누르는 할아버지의 눈가에도 할머니를 꼭 닮은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정원의 식물과 조명과 꽃이 노부부의 화목한 모습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보기 좋은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다. 보는 사람이 절로 흐뭇해지는 광경이었다.
“저 두 분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그러네요.”
우리는 한동안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용히 혼자만의 생각에 젖었다. C도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지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엄마도 여행 다니고 싶겠지.’
‘엄마랑 같이 왔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무릎이 불편해 먼 여행을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차마 같이 오자는 말을 건네 보지 못한 게 괜히 후회스러웠다. 어차피 엄마는 따라나설 엄두를 못 내고 거절했겠지만,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만 떠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엄마에게 ‘우리 다음에 좋은 곳에 같이 여행 가자.’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살사 공연을 관람하는 중에도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가, 엄마의 답장을 확인하고 비로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엄마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래, 우리 딸. 고마워. 잘 먹고 잘 쉬고 돌아와.’라는 답을 보내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 양희은의 노래 <별과 꽃>을 들었다. 엄마 차를 타고 여행 갈 때 엄마가 항상 듣던 앨범이 있었는데, 그 수록곡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다.
언제나 당신에게 별을 따주고 싶었죠
하지만 마음처럼 그렇게 하지는 못했죠
하늘의 별보다야 당신이 더 귀한데
사는 게 왜 그리도 힘이 들었나 몰라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런가 봐요
그저 당신하고 웃으면서 살면 그만인 것을
왜 나는 하늘의 별만 한아름 안겨주려고
웃지도 못하면서 살아왔는지
하루 하루 하루를 웃으며 살아요
그 웃음들이 모여 빛나는 은하수 되겠죠
언제나 당신에게 꽃을 사주고 싶었죠
하지만 마음처럼 그렇게 하지는 못했죠
꽃집의 꽃보다야 당신이 더 귀한데
사는 게 왜 그리도 힘이 들었나 몰라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런가 봐요
그저 당신하고 얘기하며 살면 그만인 것을
왜 나는 화사한 꽃만 한아름 안겨 주려고
얘기도 못하면서 살아왔는지
하루 하루 하루를 이야기 나눠요
그 얘기들이 모여 화사한 꽃밭이 되겠죠
화사한 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별처럼 반짝이지 않아도 내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고 감사할 수 있는 존재는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에게 웃을 일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엄마 차에서 이 노래가 나올 때면 해맑게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나처럼,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던 여행객 할머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