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기 #11. 지금을 건지자
쿠바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 식사를 하며 우리는 지금까지의 여행과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 후면 마추픽추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고 기대되었지만, 가슴 한편에는 아쉬움이 자리했다. 첫 여행지였던 쿠바와 이별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여정에 대한 기대와 떠남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어정쩡한 감정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는 밤이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아쉽네요.”
“쿠바 마지막 밤인데 옥상에서 별이나 볼까요?”
“좋아요.”
C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먼저 옥상에 가자고 제안했다. 다음날이면 페루로 이동해야 했지만, 우리는 취침시간을 미루고 다 같이 옥상으로 올라갔다. 모두 쿠바에서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낮의 후덥찌근함이 사라진 하늘엔 진한 태양 대신에 소박한 별이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낮에 본 모습보다 조그맣고 조용했다.
사진이 취미인 C는 카메라를 들고 올라왔다. 그는 삼각대까지 챙겨 와서 야경 촬영에 열중했다. 별을 좋아하는 A는 오리온자리를 보고 신이 났다. 그녀는 이토록 선명하게 오리온자리를 보는 게 처음이라며, 한 층 들뜬 얼굴로 별자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떤 별자리는 겨울밤이 아니면 관측하기 힘든 별자리라고 했다. 그리고 어떤 별자리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했다. C는 카메라와 함께, A는 별자리 이야기와 함께 쿠바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별자리와 사진에 큰 흥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이 순간을 내 눈과 귀에 더 많이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고 밤에 들으려고 아껴두었던 음악을 재생했다.
마지막 날의 밤공기를 닮은 노래가 속삭이듯 내 귀에 닿았다. 시야에 들어온 풍경과 딱 어울리는 노래였다.
지금 - 윤종신, 하림, 조정치, 에디킴
모두 다 지금을 살고 있잖아
모두 다 느끼는 게 다 달라
언젠간 추억이 될 지금 기억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누구는 그때도 반가운 인사
누구는 그때에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어
지금의 그를 소중히 해
한없이 밉고 싫어도
나에게 상처 주었어도
가슴 한 켠엔 좋은 기억
서롤 위했던 그 날들이
시간은 날 기다려 주지 않아
서둘러 그에게 손 내밀어
사랑할 시간만으로도 모자라
지금 같은 하늘
또 하루 해는 져가고
붉은 저녁은 다급해
사랑한다고 말해도
이미 달의 시간인 걸
지우고 싶은 기억도
떠올리기 싫은 얼굴도
모두 내 인생의 조각들
잘 닦아 반짝이게 해봐
수많은 기억의 별들을
헤아리다 잠들었으면
눈 감고 지난날 그려보다가
다시 뜬 태양이 따뜻하게
아직 다 하지 못한 사랑 하라고
남은 길 비추네
같은 하늘 지금
쿠바에서 있었던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던 쿠바인들, 시차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반 감긴 눈으로 감상했던 재즈 바 공연, 겉모습은 멋있지만 매우 불편했던 올드카, 비를 피하느라 급하게 들어간 카페의 커피 향, 엉거주춤히 마무리했던 살사 수업, 아름다웠던 카리브 해변의 석양, 해가 지기 무섭게 달려들어 우리를 물어뜯던 모기들, 매일매일 식사와 함께 곁들였던 달콤한 칵테일, 주인아저씨의 솜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랍스터 요리. 기분 좋은 기억도 있고 불쾌한 기억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모두 반짝이게 닦아서 추억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 추억을 헤아리며 쿠바에서의 마지막 잠자리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별은 온데간데없고 공항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하루아침에 보이지 않게 사라진 별들처럼 우리의 지금 순간은 흘러가면 모두 과거가 되고 희미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에겐 지금을 기억하기 위한 저마다의 방법이 있다. 사진은 매 순간순간에 느낀 감정을 저장하고 간직하기 위해 C가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볼 때면 언제나 뷰 파인더와 셔터를 통해 기록한다. 지식을 남기는 건 A의 기억 방법이다. A는 인상 깊은 유적지나 현지의 문화를 보고 나면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관련된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A는 오리온자리에 대한 이야기나 자료를 볼 때마다 쿠바의 밤하늘을 기억할 것이고, C는 남겨진 사진을 보며 그날 밤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지난밤 들었던 음악을 기억장치로 삼았다. 이 노래가 다시 들려올 때마다 쿠바에서의 추억에 잠길 것 같다.
‘나중에 이 노래를 들으며 지금을 회상하게 될 때에는 더 많은 기억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