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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모양 Mar 24. 2021

세상은 참 넓고, 내가 보던 창문은 작았다

남미 여행기 #14.페루 레일

코발트색 페루 레일 기차를 탔다.

마추픽추를 만난다는 설렘. 그 두근거림 때문일까. 기차소리마저도 마추픽추를 닮은 ’피피추추’로 들렸다. 내가 지금 페루에 있다니. ‘피피추추’하며 달리는 기차를 타고 있다니. 마추픽추를 보러 가고 있다니. 푸른색 기차에 앉아 창 밖의 초록빛 페루를 감상하고 있다니. 이미 내 마음은 기차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마추픽추를 향해 다다르고 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앞뒤 좌우를 살피다가 보통의 기차와 다른 페루 레일만의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거기엔 창문이 훨씬 크게 나 있었다. 천정의 1/3에 가까운 부분까지 유리창이었다. 휑하니 투명한 기차 뚜껑. 왜일까 의아했다.


우리와 같은 열차 칸에 탄 사람들을 쓰윽 둘러봤다. 젊은이도 있고, 어르신도 있었다. 카키색 나시티를 입고 재킷을 허리에 둘러맨 유러피안 할머니도 있고, 눈이 살짝 비치는 선글라스를 낀 젊은 커플도 있고, 40L가 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학생도 있고, 앉자마자 게임기 삼매경에 빠진 어린아이도 있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국적에 상관없이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치열하게 살던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하고 있다니. 설렘이 더 고조된다. 마추픽추 여행은 그들 모두가 떠나올 가치가 있는 훌륭한 일탈이겠지.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를 만날 거란 그 생각에 맥박이 계속 뛰었다.


다시 창밖을 봤다. 산이 빼쪽하니 솟아있었다. 굽이치는 길을 따라 이어지는 안데스 산맥. 강과 산허리를 굽이치며 달리는 기차를 보며 나는 그제야 널따란 창문의 용도를 알았다. 유리창문은 높이 솟은 페루의 산 봉우리를 감상하게끔 배려한 장치였다. 삐쭉하게 솟은 마추픽추 스타일 산은 높이와 경사가 남다르기 때문에 그 정도 높이까지 창을 뚫어 놓아야 잘림 없이 산 꼭대기를 볼 수 있었다. 레일 가까이에 저렇게 높은 산들이 우뚝 서있으니까. 여행객들이 앉은 눈높이에서 산 정상과 하늘까지 보이게 하려면 천정까지 유리창을 만들어야 했구나. 아이코 세심해라. 역시 남미의 스케일이란 다르구나 생각했다.


충분한 높이만큼 뚫린 창문. 그 구멍을 통해 산봉 꼭대기를 올려다보니 고작 10살도 안 된 꼬마가 100살 된 할아버지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서있는 지대가 이미 높이 솟아있는 곳인데, 나는 이미 한라산 꼭대기보다 더 높은 해발고도 2,850m에 있는데, 여기서도 까마득히 올려다봐야 하는 저 높은 산은 도대체 얼마나 높은 걸까. 고만고만한 높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머물러있던 내 생각의 키가 쑥 자란 기분이다.


‘내가 알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만.’


여행을 떠나면 꼬꼬마가 된 것 같다. 대자연을 만나면 내가 보는 세계가 확장된 걸 느끼지만,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싶어 겸손해진다.


‘여태껏 살면서 당연하다 여겼던 KTX 정도의 창문 크기도 페루 레일 기차에는 부족한데. 내가 무지막지하게 높다고 생각했던 한라산 정상도 지금 여기 페루에 선 우리들의 발바닥보다 낮은 높이인데. 어디 이뿐일까. 지구에는 내가 닿지 못한 세계가 더 많고, 아직 내가 깨닫지 못한 넓고 높은 지혜가 셀 수 없이 남아있겠지. 옳다고 생각했던 많은 게 무너지겠지.’


하루 8시간 이상을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 속에 가두어놓았던 눈동자를 살짝 틀었을 뿐인데, 컴퓨터 윈도우보다 널따란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가볼 곳이, 배울 것이, 감탄할 모양이 한참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계속 겸손해졌다.


세상은 참 넓구나. 나는 정말 작구나. 레일 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높은 곳으로도 올라가 보고 싶고 낮은 곳으로도 다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젊을 때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녀야 한다며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찾아다니고 싶고, 나이가 들면 더 늙기 전에 다녀야 한다며 계속 여기저기를 걷고 싶다. 동시대라는 같은 기차를 탄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풍경을 나누고, 영감을 받고, 보고 또 보며, 배우고 또 배우는 사람이고 싶다. 오래오래 겸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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