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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길 colour Apr 23. 2024

내가 선택한 이름으로 불리기


   




  보고서를 작성하며, 컴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득 이래선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울화통이 터졌다. 까만 모니터에 비춰진 퀭한 표정의 내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거니와, 영혼의 엑기스가 쪽쪽 빨려 공중분해 될 것 같은 위기감에 침이 꼴깍 삼켜졌다. 동시에 브런치에서 유독 눈에 띄던 '퇴사 후 세계여행'.'퇴사 후 제주''퇴사와 이사','박차고 퇴사','퇴사가 만사' 등등 다양한 주제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하지만 조금만 차분해져도 알 수 있는 것이 내가 얻고 싶은 정답은 퇴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일에 대해 진심이고 일터로의 출근에 이어 집으로의 출근도 꽤나 가뿐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다만, 삶과 일의 균형 그 틈에서 나의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완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풀어나갈 필요가 있을 뿐이다.


  마침 며칠 전 눈여겨봐 두었던 자원봉사 게시글이 불현듯 떠올랐고, 한 달에 2번, 주말집단미술치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첫 회기를 준비하며, 치료자로서의 역할에 둔감해진 내 모습에 맥이 풀리긴 했지만, 이 곤궁함을 받아들이는 과정 역시 내가 기대했던 것이니 자연스레 흘러 넘겼다(?).


  그러나 정작 참여자분들을 기다리며, 허락도 없이 벌컥벌컥 나대는 심장에 흠칫 놀랐다. ‘사용할 재료는 빠진 게 없을까? 무엇을 묻고, 무엇을 묻지 말아야 할까? 질문 스크립트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나? 숙지했던 윤리기준에 변경사항은 없나?’등등 밤하늘 별처럼 총총히 떠오르는 자기 점검의 질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중에서도 나를 어떤 이름으로 소개하면 좋을까란 질문에 고심했다. 평소 ‘이길’이란 별명으로 나를 표현하고 있지만, 오히려 ‘리;쌍’처럼  직관적이며 거칠고 편한 이름이 주는 통쾌함에 대하여 사뭇 관심이 가는 요즘이라 더욱 그랬다. 무방비 상태로 참여자들을 해제시키고 친근감을 더할 별명 어디 없나?


  불현듯 봄의 초입에 여러 포기를 쟁여놓고 먹었던 봄동 향기가 아른거렸다.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봄동처럼 무쳐 먹고, 부쳐 먹고, 끓여 먹고, 날로 먹는 편안함과 특별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조력자가 되고 싶어졌다. 한껏 펼쳐진 샛초록 잎의 쨍쨍한 자태도 마음에 들지만, 딱 그 한철에 봄동 하나면 마음이 구수하고 따뜻해지는 푸근함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상담자의 성품과 맞아떨어진다. 그렇다! 오늘 집단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내 별명은 봄동이다.


  아니나 다를까, 별명이 주는 예상치 못한 영향력은 집단을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재래시장 어느 한 켠의 훗훗한 모습이 절로 떠오를 정도랄까?! 내 소개 이후 별명의 대부분이 식물계를 지향하는 베지테리언 취향으로 구성되었는데, 애기똥풀, 고사리, 수선화, 분홍추 심지어 무도사까지 나오며 별명에 대한 에피소드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 30분 정도로 계획되었던 상담시간의 1/3을 별명에 새겨진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그깟 별명이 뭐라고 이렇게 고심하고 열을 올리나 싶었는데 허투루 들어 넘길 수 있는 이야기가  단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신체적 콤플렉스를 무도사로 표현한 학생부터 갓난아기를 두고 병원에 있는 자신을 한심스러워하며 울음이 터진 애기똥풀까지 쉽게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들이 별명에 묻혀 끌려 나왔다. 그들이 느꼈을 열등감, 자괴감, 무기력감, 심리적 피로감, 고독감 등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하며, 본인이 결정하지만 정작 타인에 의해 더 많이 불려지는 별명 또는 이름이 다양한 감정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경험을 나눴다.


  이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별명이나 이름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때론 한계를 규정하거나 속박하는 장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몰카범죄자를 체포한 경찰관의 이름이 금육순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할까? 위험을 무릅쓴 경찰을 칭찬하기에 앞서 금씨 집안의 여섯 번째 딸이 여자의 몸으로 과한 일을 벌인 것 아니냐는 핀잔 섞인 걱정을 하지 않을까 싶다. 털털하고 듬직한 막내딸 미정이의 이름 풀이가 '정해지지 아니함(未定)'임을, 그래서 '미정'으로 불릴 때마다 납작해지는 불쾌함을 느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 또는 존재의 고유함을 단숨에 눌러재끼는 이름이나 별명이 야속하다. 이에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개명을 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별의별 생각과 감정의 끈을 이어가며 상담 끄트머리에는 맞은편 사람의 별명을 불러주는 시간을 가졌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준 적이 없으니, 그깟 별명 숨너어갈 정도로 낯간지럽게, 다정하게, 속삭이며 불러보자고 다들 작정했다. ‘애기똥풀’이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다 그윽히 나를 바라보며 내 별명을 불렀다. ‘봄똥’!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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