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교토를 떠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간사이 공항에서 떠나는 비행기 시간이 꽤 늦었다. 한 두군데 정도는 더 볼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부지런히 움직였다. 히가시 혼간지는 계획에도 없던 곳이었다. 다만 돌아다니면서 구글 지도를 보는데 교토 역 앞에 거대한 녹지 표시가 눈에 계속 밟혔다. 이렇게 넓은 사찰이 교토 시내 한 가운데에 있다니, 궁금증이 생겼다. 그때 히가시혼간지(동본원사)와 니시혼간지(서본원사)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사찰은 이미 볼만큼 봤으니 교토 박물관이나 들를까 싶던 차에 눈길을 끈 것은 고에이도의 사진이었다. 나는 왜 이리도 거대한 건물에 약한 것인지, 갈등이 일었다. 교토에 왔는데 교토 국립 박물관을 가지 않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리도 멋진 흑빛의 목조 건물을 보라. 교토 역 안의 락커에 캐리어를 넣어두는 그 순간까지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듯, 나는 이미 히거시혼간지 정문 앞에 서있었다.
아미타당문
원래 히가시야마의 산사였던 혼간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땅을 기증하면서 지금의 니시혼간지 자리에 들어선다. 교토의 중심에서 일본 최대 불교 종파인 정토종의 총본산으로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 혼간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혼간지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세력을 둘로 나누는 술책을 생각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간지 내 세력다툼을 이용해서 지금의 히가시 혼간지 자리의 땅을 기증해서 혼간지를 히가시(동)과 니시(서)로 나눈다. 혼간지의 본래 사찰은 니시 혼간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것도 니시 혼간지 쪽이다.
니시혼간지의 비운각은 금각, 은각과 함께 교토 3대 누각으로 일컬어지지만 아쉽게도 비공개 대상이다. 니시혼간지는 에도 말기, 메이지 초기의 신센구미가 본거지로 활약했던 곳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불교신문)
히가시 혼간지는 17세기에 창건하여 역사가 니시 혼간지보다 짧은 것도 있고, 1895년에 재건된 사찰이기 때문에 니시 혼간지와 비교하자면 비교적 신식의 느낌이 난다. 그럼에도 히가시 혼간지의 정토종 오타니 파는 통계로만 일본에 550만 명의 불자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 종파로서 그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또한 혼간지를 창건한 신란을 모신 고에이도(어영당)은 나라 도다이지(동대사)의 다이부쯔덴(대불전) 다음으로 큰 목조 건축물이기 때문에 많은 여행자들이 그 위용을 보기 위해 히가시 혼간지를 찾는다. 나 또한 그러했다.
고에이도몬
사찰의 정문은 고에이도몬(어영문), 고에이도와 직선으로 이어지는 대문이다. 검은색, 흰색, 그리고 부분부분의 금색의 조화가 눈에 띄는 거대한 정문이다. 정문에서부터 히가시 혼간지의 세력이 느껴지는데 문 너머의 고에이도의 위엄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에이도
중국에서 자금성 태화전, 공묘 대성전 등 웬만치 큰 목조 건물은 많이 경험해봤다고 생각했는데, 히가시혼간지 고에이도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내부 본당의 크기보다 더 넓게 사위로 뻗는 지붕이 연출하는 위압감이 대단하다. 색감의 영향도 못지 않다. 원래는 도다이지의 다이부쯔덴을 보기 위해 나라도 다녀올까 싶었는데, 다녀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워졌다.
아미타당
가람 배치는 다소 엉뚱한 면이 없지 않다. 고에이도와 그로 통하는 문은 굉장히 거대한 반면 아미타여래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아미타당과 아미타당문은 비교적 소박하다. 물론 다른 사찰 건물과 비교한다면 절대로 작다고 할 수 없겠으나, 본래 사찰의 금당과 본당이라 하면 사찰이 모시는 본존불의 전각을 중심에 두고 가장 크게 짓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만약 그것이 도리라면 히가시혼간지는 창건자의 전각을 더 웅장하게 만들었으니 영 이상하다. 물론 한중일의 불교가 모두 다른데 그것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역시 가당치 않은 것은 매한가지다.
히가시 혼간지를 끝으로 교토 여행이 끝났다. 히가시혼간지를 보면서 참 교토가 부럽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품게 됐다. ‘천년의 고도’라는 이름은 단지 도시가 지닌 시간성 뿐 아니라, 그 시간과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와 상징 때문에 붙는 별칭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토를 상징하는 것은 분명 천년의 시간을 보증하는 곳곳의 불교 사찰과 신사다.
도심 한가운데의 이런 거대한 사찰이 있다는 것은 못내 부러운 점이다
(사진출처 두산백과)
서울도 어찌보면 천년의 고도다. 백제 때부터 수도였고, 고려 때도 개경을 중심으로 평양, 경주와 함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조선 초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조선 이전의 서울을 기억할 수 있는 대부분의 도심 사찰이 사라졌다. 유홍준 교수는 교토를 ‘사찰의 도시’라 하고,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 하였다. 물론 도심 속 거대 궁궐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서울의 자랑 중 하나라 할 수 있겠으나, 수많은 옛 사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점은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교토를 떠나며 역사 수도 서울에 대해서도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에필로그 에세이에서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