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째날
교토의 아침은 뜨겁다. 특히나 점심 직전의 태양은 애간장 태우듯 뜨거웠다. 습하기는 또 어찌나 습하던가. 하늘은 청량하고 몽실구름은 솜사탕을 걸어 놓은 듯 아름다웠지만, 우리의 얼굴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다음 목적지가 있는 산쪽으로 가니 산사의 음기가 더해져 습한 기운이 강해졌다. 중심 관광지가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 차량도 인파도 없이 한산한 도로 위에서 그늘을 따라 걸으며 다음 목적지인 난젠지(남선사)로 향했다.
교토의 사찰과 신사는 그 역사가 도시 못지 않게 오래된 곳이 많지만, 자연재해 또는 오닌의 난 등의 전란으로 옛 것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찾기 어렵다. 목조 건축물의 숙명이겠지만, 일본은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시작한 에도 막부 때 교토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한다. 난젠지 역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직전의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선종사찰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 중건된 사찰 중 하나다.
난젠지는 선종 사찰로 산몬(삼문)과 금당, 방장(호조)까지 일직선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가 인상적인 곳이다. 교토 3대 산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난젠지의 산몬은 여느 산몬과 도저히 비교불가할 정도로 육중한 자태를 뽐낸다. 세월의 흔적이 쌓여 더해진 고즈넉한 기운은 거대한 누각의 위엄을 극대화하면서 사찰의 기운을 입구에서부터 발산한다. 산몬은 정원의 푸르른 나무 위로 솟아올라 녹음 그리고 새파란 하늘 사이에 멋진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 꽤나 장관이다. 입장료를 내고 문 위에 올라 교토 시내의 전경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올라가지 않았다.
산몬을 지나 바로 나오는 건물이 불상을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한국과 중국과 달리, 일본 사찰은 종교 행사가 있을 때가 아니면 법당 내부를 공개하지 않아 안에 들어가 인사를 드릴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찰에 가더라도 불상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난젠지의 경우에는 그나마 문이 열려 있고 창살을 통해 내부를 엿볼 수 있었다. 대체로 어두운 나무빛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법당 내부도 외부처럼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다. 일본의 사찰이 대체로 그런듯 한데, 난젠지의 불상도 법당의 크기에 비해서 모두 작은 크기의 삼존불이다. 다만 천장에 소용돌이 치듯 용맹한 용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은 다소 인상적이다.
법당 옆으로는 목조의 사찰에 다소 어울리지 않은 석조의 수로각이 있다. 150년 전 근대화를 꿈꾸던 메이지 시대에 고대 로마 수로를 본따서 만들었다는 구조물이다. 일본에서, 게다가 교토에서 이런 근대화의 흔적을, 게다가 사찰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경험이다. 그 당시에는 신식 건축물이었을 메이지 대의 수로각도 지금은 세월의 뒤안길에서 관광객을 맞이하는 구조물로 전락했으니, 울창한 나무를 배경으로 바라보는 수로각의 모습에서 세월이 무쌍함이 느껴진다. 다만 수로각은 여전히 제 기능을 하면서 맑은 물을 교토로 끌어오고 있으니 아직 수명이 다하지는 않은 듯 하다.
수로각을 지나면 작은 정원인 난젠지가 나온다. 이곳은 500엔의 별도 입장료가 필요하다. 작은 방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둥글게 길이 나있으면서 연못과 온갖 나무로 꾸민 정원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낸다. 다방의 창 너머로 슬며시 비치는 풍경은 그야말로 산수화가 다름이 없다. 그 규모는 다소 작아서 500엔의 값이 아깝다 할지는 모르겠으나, 단지 시각적인 효과만으로 이렇게 시원한 기분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방 마루에 걸터앉아 차라도 한 잔 마시며 시시콜콜한 수다라도 떤다면 이것보다 더한 신선놀음이 있을까.
법당의 뒤로 가면 방장(호조)가 있는데, 호조 안쪽으로 이어지는 정원(호조 정원)이 난젠지의 하이라이트다. 호조 정원은 전형적인 가레산스이식 정원이다. 흔히 일본 정원하면 떠오르는 하얀 모래에 작은 바위와 다듬어진 나무로 꾸민 것이 가레산스이 형태의 정원이다. 물이나 바다를 의미한다는 하얀 모래는 물결 치듯 곱게 정돈돼 있다. 움직이지 않는 하얀 물 위에서 바위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림 없이 정적인 힘을 뿜어낸다. 무로마치 시대의 가레산스이식 정원은 중국 명대의 산수화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마치 그림을 보는 듯 하다. 복도를 따라 안쪽까지 들어가 다양한 모습의 정원을 구경할 수 있는데, 이 또한 500엔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난젠지를 돌아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난젠지는 물두부(유두후) 정식으로 유명하다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우리는 가볍게 패스했다(그래도 기온 거리 등과 비교했을 때는 더 싸다). 대신 오다가 우연히 발견한 블루보틀 카페에 들어가서 한껏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로 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차가운 카페라뗴로 몸을 식히니 이곳이 지상낙원이었다. 아까 난젠지에서 시간을 보내며 유유락락하고 싶다는 말은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도 간사한 현대인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