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선배의 충고로 스스로 깊어지는 사회생활 속 예절문화 되새겨
밥상머리 교육이 사회생활의 기초 예절이다.
어느 선배의 충고로 깊어지는 예절문화
‘누군들 맛있는 걸 왜 먼저 먹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예의 때문에 먹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참고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네!!’
10여 년이 훨씬 넘은 어느 날 그 선배는 조용히 귀띔을 해 준 적이 있다.
우리는 주변 음식점에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며 무질서하게 음식을 접하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물론 얼마나 반갑고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 좋아서 반가워서 그럴 수 있다.
내가 좋다고 공공시설에서 주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떠들어댄다면 공중도덕은 곧바로 실종되고 말 것이다. 이는 농담이란 상대방도 즐거워해야 농담이 되고 재치 있는 말이 되는 것이지 話者 홀로 좋으면 비아냥이 되는 것이지 결코 농담일 수 없는 이치일 것이다.
공중질서란 것도 주변이 和氣靄靄해지고 서로가 좋아지는 문화를 만드는데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음식점에서 상대방을 아랑곳 않고 떠들어 대면서 음식을 공유하는 것까지도 좋다.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그네들의 가정교육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밥상교육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훤히 알 수 있다. 가끔 매스컴에서 말하는 캠페인 성 ‘밥상교육의 중요성’도 그와 일맥상통하리라.
일찍이 공자의 署로「논어」에서 전하는 예절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내재해왔기 때문일까?
2천5백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효제(孝悌), 仁과 禮, 忠 등을 이야기하는「논어」의 문장들이 주는 예의범절에 대한 울림은, 요즘의 사회생활이나 조직의 리더십 이론보다 중요하고 일상생활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학즉불고(學則不固)’ 공자님의 말씀대로 학문과 사회생활에 대한 삶의 가치와 예절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할 수 있어 즐거웠다
또, 先人들은 일찍이 ‘밥상머리 교육이 완성이 되면 더 이상의 예의범절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중요성은 인간 가까이 함께하는 동물의 세계에서 살펴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애완용으로 기르는 가정까지 늘어난 판이니 인간과 가장 가까이 있는 犬들의 세계를 한번 바라보도록 하자. 평소에는 꼬리를 치며 서로 유화적으로 놀던 그네들도 막상 먹을 것을 놓고는 동종을 넘어 가끔은 밥을 주는 주인에게까지 으르렁댄다.
이건 필자가 뭘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곰곰이 다시 곱씹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유아교육의 시작, 밥상교육!!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유아시절에는 생각나무가 자라지 않아 唯我獨尊식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난다. 즉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다고 생각해 봐라. 그게 끔찍하게도 작금의 사회생활에서 급기야는 패륜아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항상 할아버지는 손주 귀엽다고 맛있는 음식을 손주가 먹는 걸 방상 머리에서 크게 야단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손주의 귀엽다는 것이 할아버지 수염을 잡고 흔들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부모의 교육의지가 뚜렷하고 그 부모의 밥상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는 가정에서는 부모가 나서서 그걸 못하게 막아 나서고 아이의 교육을 엄히 밥상머리에서부터 시키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사이에 놓고 상대방을 아랑곳 않고 먼저 먹는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고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조선시대 예절교육서「동자례(童子禮)」
그럼, 예절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하는 것일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조선시대의 어린이 예절 교육서인 「동자례(童子禮)」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성일이 사숙에서 동자들에게 가르치는 예절을 모아 만든 책으로 일종의 예절 교과서다.
「동자례」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는 것부터 머리를 빗는 것, 옷을 입는 것까지 방법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먹고 마시는 밥상머리 교육을 매우 강조한다는 것이다. 식사는 인간을 동물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행위다. 즉 식욕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자 원초적인 욕구다. 예절이란 먹는 행위로부터 시작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러므로 이 부분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 본성을 버리지 못한, 즉 예절교육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된다. 그래서 밥상머리 교육은 시대를 불문하고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고 예절교육의 첫걸음이 된 것이다.
그중 동양을 넘어 그 유명한 가계인 케네디가의 밥상머리 교육은 교육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동자례」에 보면 밥상을 앞에 두고 먹을 때는 밥상과 거리를 너무 가까이하지 말고, 조용히 수저를 들어 차례로 식탁 가운데에 두고, 급하게 먹지 말라고 나와 있다. 또 다른 사람과 음식을 먹을 때는 배부르도록 먹지 말며, 손으로 만지작거리지 말며, 밥을 뭉치지 말며, 남은 밥을 그릇에 다시 가져다 놓지 말며, 한 입에 크게 집어넣지 말아야 한다고 쓰여 있다. 이 ‘~하지 말라’라는 금기의 숨은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예절교육의 시작은 부모로부터
비단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지켜야 할 순서가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순서란 존경 이전의 아주 기본적인 도리다. 밥을 먹을 때는 어른부터 시작한다. 우선 밥상에 사람들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어른이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수저를 든 뒤에도 어른이 식사를 먼저 시작해야 아이도 식사를 할 수 있다. 기능적으로만 봤을 때는 누가 먼저 먹든, 어떻게 먹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행위들을 통해 순서를 배운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라는 속담처럼 하찮은 음식이라도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뜻인데, 이렇게 순서를 몸으로 익힌 아이들은 다른 모든 일에서도 순서를 지킬 줄 아는 아이가 된다.
반찬을 뒤적거리지 말고 한번 집은 것은 가져와 먹는 것이 옳다고 「동자례」는 가르친다. 자신이 좀 더 먹고 싶어도 다른 사람을 위해 남겨주는 배려도 필요하다. 이것은 밥상머리 교육의 핵심인 절제를 가르치고자 함이다. 절제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예절의 가치로 손꼽히는 것이다. 절제를 배운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와 배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바르게 기르려면 가장 먼저 예절을 가르쳐야 한다. 대개 사람이 바름을 잃고 성인(聖人)이 되지 못하는 것은 어린 나이에 예절을 배우지 못해서이고, 귀와 눈과 손과 발이 따를 것이 없고, 움직이고 멈추고 말하고 침묵함에 기준으로 삼을 것이 없게 된 까닭이다.’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예절교육은 대단한 것도 아니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에서 부모로부터 기준을 배우며 바른 습관을 익혀나가는 것이다.
비록 성선설을 말하지 않더래도 아이들은 심성이 착하다. 처음부터 무례한 아이는 없다. 그러나 모르는 채로 자라게 되면 아이들은 예절이나 사람다움에 대해 배우지 못해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어떤 것이 무례한 일인지 모르게 되고 만다. 예절에 대해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사회생활의 기본은 음식예절의 순서
한번 더 강조해서 사회생활에서 음식예절에 더 깊이 들어가면 이렇다.
(1) 모든 음식을 한상에 올려 접대한다.
(2) 어른이 식사를 시작하면 수저를 들어서 먹고, 먼저 식사가 끝난 경우에는 밥그릇에 수저를 걸쳐 놓는다.
(3) 식사 도중에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4) 숟가락과 젓가락은 양손에 들고 사용하지 않는다.
(5) 반찬은 뒤적이지 말며, 뼈나 가시는 그릇에 골라 놓는다.
(6) 국물은 숟가락으로 떠서 소리 나지 않게 먹는다.
(7) 먼저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다. 移席시에는 목례로 나가고 동석자에게 미리 사유를 고지한다.
이렇듯 음식에는 격에 맞는 예절이 있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필요한 기초예절 부분이 음식예절인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곧 상대가 이 지구 상에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고 나 홀로 살 수 없기에 음식예절은 인생의 基本敎育으로 社會生活에서 가장 중요하다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인간의 가장 기본예절은 飮食禮節이다. 음식예절이 바로서야 음식문화가 창출되며 이는 곧 문화예술이 인간에게 충족되고 위대하고 유구한 歷史가 創造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 제발 더 이상 늦지 않게 우리 民族의 自矜心으로 가장 가까이에서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實踐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