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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Jun 27. 2019

거울에 비치는 것보다 사물이 더 가까이 있습니다

지나간다는 것 그리고 '소수의 고독'


   갑자기 여름이 깊숙이 들어옵니다. 잠들기 힘든 날들이 이어집니다. 벌써 너무 더운(혹은 더울) 여름입니다. 에어컨 타이머를 넉넉하게 맞추고 선풍기까지 동원해도 잠이 깨곤 합니다. 그렇다고 밤새 에어컨을 돌릴 호방함은 없기에 몸을 환경에 맞추게 됩니다. 어떻게든 현재의 온도에서 잠드는 것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상황 자체도 있겠지만 자신의 심리적 거부감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에 비례하여 삶의 갈증은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내려놓으면 편하다'는 말을 마냥 우습게 들을 수만은 없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지금 상황을 대입해본다면 현재의 온도에 대한 저의 심리적 거부감과 싸우는 것이 되겠지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으로 '그래 여름이 이 정도는 더워줘야지!'하고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밤 어떻게든 잠을 자려했지만 여전히 무덥고 머리는 복잡하고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머리가 아플 때 책을 읽으면 그것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습니다. 다른 생각들을 옆으로 치워놓고 평정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에 사로잡힌 머리를 이완시켜 준다고 할까요?

소수의 고독

   오래간만에 시원한 캔맥주를 마시며 '소수의 고독'이라는 책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책장 눈에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올려져 있는 책입니다. 예전에도 좋아하는 책이었지만 손이 자주 가지 않았었습니다. ‘상실의 시대’와 비슷한 느낌 같으면서도 더 심연을 걷는듯한 쓸쓸함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깊은 쓸쓸함이 여운이 되어 이끄는지 자주 펼쳐보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나이가 들며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는 말도 될까요?  
 
이런 것을 보면 책은 한번, 두 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의 삶이 오늘 다르게 느껴지듯 같은 이야기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같은 이야기에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들을 붙여 모으면 나라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의 대상에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모아 보면 결국 나를 형성하고 있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상, 사건, 사람에 대해서도 쉽게 단정 짓지 말라는 말도 됩니다. 뭐든 무용한 것은 없을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나와 마주하는 것들을 대하는 자세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번 기회를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서 겪어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 이 책도 다 읽었을 때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습니다. 매우 슬프고 아픈 쓸쓸함을 느꼈다는 정도? 그래서 여름의 긴 밤을 이용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았습니다. 책에 표시한 문장들을 보면 조금씩 유추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일종의 결벽증처럼 책을 항상 새것처럼 읽는 저에게 줄을 친다는 것은 매우 드문일인데 이 책에는 처음 읽을 때 남긴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꽤나 꼼꼼하게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는데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생각에 빠져있었는지는 늘 희미하게 다가옵니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문장도 있지만 전혀 상관없는 문장들에도 표시가 되어 있어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그런 여러 문장 속에서 짧은 한 줄이 눈에 띕니다.

 
'거울에 비치는 것보다 사물이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때의 저는 이 문장에서 어떤 것을 읽었던 것일까요?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나 적혀 있는 이 문장에 왜 굳이 흔적을 남겼을까요? 책을 덮고 잠시 생각해봤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뭐든 지나면 이유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래의 저에게 알려주기 위해 의미 없는 문장에 표시했던 것은 아닐까? 그때 지금 내가 가진 사소한 고민, 감정을 하나하나 기억 못 하듯이... 삶은 늘 진행 속에 존재하며 감정도 흘러가버릴 뿐이라고.

 
이 책을 다시 펼칠 때 나는 또다시 어떤 감정과 고민 속에 빠져 있겠지만 이렇게 흘려보내라고 말해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생각해보면 마음을 뒤흔드는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들이 시간이 지나면 정돈된 하나의 감정으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을 충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아플 수도 있고 조금 더 피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시간 속에서 견뎌낼 수 있을 테니까요.
  
누구나 지금을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감정대로 판단하고 그것의 결과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후회가 두려워 나아가지 못한다면 실수할 여지도 없겠지만 그만큼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어버리겠죠. 많은 경우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나간다는 건 다시 말하면 나아간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나아가기 힘든 날에 저는 심호흡을 하고 나쁜 생각을 잘라내며 이런 일들을 수없이 흘려보내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킵니다. 심호흡을 해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중독성이 있는 나쁜 생각들을 떨쳐내고 이것 역시 늘 그래 왔듯이 잘 흘려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음을 흔들었던 고민도 눈물이 일상을 적시던 아픔도 시간을 거슬러 오르진 못합니다. 버티면서 시간이 잊게 해 줄 거라 믿어야 합니다. 지금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래도 비가 내려 선선한 느낌입니다. 잠을 설쳤던 밤이 하루 지났을 뿐인데 더위가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추워져도 지금의 더위는 현실감이 없는 기억으로 남겠죠. 시간이 또 이렇게 흐르고 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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