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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May 04. 2020

네가 도망치지 않기를 바랐어

이별의 시작

   온통 설레는 표정의 사람들로 가득한 공항 카페에서 나는 좋았던 시절을 필사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항, 그 풍경이 그대로 내려다 보이는 카페의 가장 바깥 자리에 앉아 나는 목구멍으로 들어가지 않는 과일 주스를 억지로 마시고 있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주스가 줄어들 때마다 남은 시간 역시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투명한 주스잔만 만지작거렸다. 억지로 목구멍에 밀어 넣으면 넘칠 것만 같았고 그건 오늘 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란 게 있다면 금방이라도 수많은 감정들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걸 내리누르는 일은 언제나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왔다.


너무나도 상큼한 빛깔의 과일 주스는 불투명한 앞날과 대비되어 나의 상황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나? 카페의 로고가 예쁜 글씨체로 인쇄되어 있는 갈색 냅킨으로 쉴 새 없이 눈물을 찍어 눌렀고 그럴 때마다 내 눈물이 묻은 부분은 더욱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냅킨 전체가 짙은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그것은 곧 내 마음에 차오르는 슬픔의 농도를 말해주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엄격한 비율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접혀 있는 갈색 냅킨을 만지작 거리며 오늘 이후 내 인생은 어떤 모양으로 기울어져갈지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겨우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한숨만이 하지 못한 말들을 대신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마지막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바보 같은 나는 그저 울기만 할 수 있었다. 이 날이, 이 시간이 분명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대처는 이렇게 서툴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그저 울었다. 울면 엄마가, 아빠가 뭐라도 해결해줄 거라 믿었던 어린 시절로 퇴행한 느낌이 들었다.


잔인하리만큼 날씨가 좋았던 그 날 공항에서 나는 그처럼 무기력했다. 차라리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좋으련만 눈 부시도록 맑은 하늘은 나를 더 절망하게 만들었다. 나의 무너져내리는 마음은, 슬픔은 그저 나만의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안 되는데.... 내 세상은 눈물에 잠기고 있는데 사람의 세상은 나 하나쯤의 슬픔 따위에는 관심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 하나쯤 없어져도 세상 사람들은 오늘을 그저 하늘이 맑은 봄 정도로만 기억하겠지.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위로받을 수 없는 절망감에 질식되어 공항에 비치는 햇빛이 점점 흐려질 때쯤 나는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웃으면서 가고 싶다던 그 사람은 의도한 듯 아닌 듯 무심하게 말했다.


'이제 가야 하는 시간이야. 촉박하게 움직이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을 해야 했다. 약속했던 수많은 미래는 허상이라는 걸 나도 그 사람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거라 말해왔지만 그건 현실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그저 지금에 집중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이게 끝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순간 이후 남은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리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메어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눈물을 마저 닦으며 나는 마음속 감정들을 토해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도망치지 않기를 바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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