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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Jun 28. 2021

피보다 진한 맛


북유럽의 긴 겨울 끝에 드디어 도래한 봄을 마중하러 바닷가 숲길로 산책을 나섰다. 

«한국 밥 냄새다! 누가 한국 밥 먹나 봐!»

숲에 들어서자마자 딸이 킁킁 냄새를 맡아가며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김치나 오이 무침 같은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한국 밥 냄새의 근원을 찾으며 숲을 둘러보다 낯익은 풀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명이라고도 하고 산 마늘이라고도 하는 나물이었다. 잎새 하나를 꺾어 코에 바짝 대니 톡 쏘는 마늘 냄새가 올라왔다. 주위를 돌아보니 온통 산 마늘이다. 부지런히 숲길을 걸어 바닷가에 나가봐야 했지만 지천에 널린 산 마늘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짝 자세를 낮추고 야들야들한 초록색 산 마늘잎을 뜯었다. 세 식구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니 금세 봉투 하나가 산 마늘로 가득 찼다. 산 마늘 한 봉투를 소중히 품고 긴 숲길을 지나 바닷가까지 산책도 했는데 날이 화창했는지, 바다 색이 어땠는지는 떠오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날의 초록색 마늘향만은 여전히 코끗에 생생하다.

한국에서 한참 떨어진 북유럽에 살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기서도 김치를 담고, 장조림을 만들고, 닭갈비를 볶고, 김밥을 만다. 교민이 많지 않아 한국 식품점은 없지만 태국 식품점, 중국 식품점에서 판매하는 한국 식재료를 쓰기도 하고, 독일의 한국 식품점으로 원정 쇼핑을 가거나, 주문을 하기도 한다. 빵도 좋고, 고기도 좋고, 브런치도 좋지만, 그래도 우리는 떡볶이도 먹어야 하고, 미역국도 끓여 먹어야 산다. 더러는 쌀가루를 반죽해 직접 떡을 찌고, 낚시를 해서 활어회를 즐기고, 화분에 깻잎을 길러 제대로 된 쌈을 즐기는 고수들도 있다. 요즘은 유럽에서도 한국 식 재료 구하기가 쉬워졌지만 바다 건너온 한국 식품은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 여전히 해외에서는 현지 재료를 변형해서 한국 음식 흉내를 내기도 한다. 제일 얇은 스파게티 면을 삶아 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단무지 대신 오이 피클을 넣고 김밥을 만들기도 하고, 독일식 양배추 절임에 고춧가루를 넣고 부대찌개를 끓이기도 한다. 쑥갓 대신 파슬리를 줄기 채 넣어 해물 탕을 끓이기도 하고, 레디쉬에 양념을 해 열무김치 맛을 내고, 루콜라를 살짝 데쳐 나물 무침을 만들기도 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즐겨 먹는 LA 김밥, LA 찹쌀파이 같은 음식들도 미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재현해낸 고향의 맛이다. 

러시아에는 러시아 인들에게도 널리 사랑받는 한국식 샐러드라는 공식적인 음식이 있다. 당근 채 고춧가루 무침, 감자채 무침, 고사리 무침, 야채를 곁들인 냉 잡채, 식초에 절인 날 생선 무침과 같은 이른바 한국식 샐러드는 러시아의 대부분 슈퍼마켓의 조리된 음식 코너에서 시판되는 인기 메뉴이다. 강제 이주로 인해 러시아에 정착하며 참혹한 세월을 보냈던 동포들은 현지의 재료로 두고 온 고향의 맛을 재현하며 그리움을 달랬을 것이다. 오래전 우리말을 전혀 못하시는 러시아 교포 분이 집 밥이 그리울 나를 위해 한국식 샐러드 여러 가지를 준비해 한 상을 차려주셨던 기억이 있다. 내가 늘 먹던 우리나라 음식과는 사뭇 다른 맛이었지만, 고향의 김치와 나물을 대신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맛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와 같이 현지화된 음식들은 러시아에서 오늘까지도 우리말 이름으로 불린다. 당근 채, 감자채 등의 음식은 Ча (차: 우리말의 채에서 유래), 절인 날 생선 무침은 Хе (혜: 우리말의 회에서 유래)라는 이름을 가졌다. 동포들은 그렇게 돌아 갈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맛과 소리에 담아 이제는 우리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까지 물려주었다. 

오늘의 교민들은 여러 이유로 혈연도 뒤로 하고, 친구도 마음에만 담아두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지만, 살아있는 게를 구해서 게장을 담그고, 콩나물을 직접 키워서 해물 찜을 만들고, 멍이와 고사리를 따러 알프스를 오르며 '맛'만은 절대 놓지 않는다. 그렇게 악착같이 재현한 고향의 맛은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향수를 달래주고, 세대와 문화를 달리하는 가족을 결속해주고, 한인 공동체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잠시 살았거나, 아주 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다니는 해외 한글학교 행사에서도 떡볶이, 김치전 같은 우리 음식은 늘 인기이다. 우리말은 서툴러도 쌈장을 바른 샌드위치를 도시락으로 싸가는 아이도 있고, 뜨끈한 국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아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절기마다 치르는 한인회 행사의 주인공 역시 푸짐한 한식이다. 교민들이 나누어 음식을 하고, 현지의 한국 식당에서 특식을 주문하기도 해서 지지고 볶아 푸짐하고 얼큰한 한 끼에 정을 담아 나눈다.

가끔 교포 2세들이 운영하는 한국 식당에 가게 되면 그들의 어린 시절 식탁을 상상해 본다. 아이들은 이민 1세인 부모님들의 외국어가 부끄럽고, 한국적인 가정교육에 반발심을 가졌을 수도 있고, 부모들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권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어 마음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말과 현지 언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하는 아이들과, 우리말을 고집하는 부모들이 마주 앉아 배추김치, 감자볶음, 제육볶음, 된장찌개와 같은 음식을 먹으며, 웃기도 하고 서로 잔소리를 하기도 했을 것이다. 부모의 세대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의 맛은 그렇게 그들의 일부가 되어, 어느덧 스스로 그 맛을 만들어 내는 어른으로 성장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식당의 김치찌개도, 잡채도 더없이 숭고한 맛을 내는 것만 같다.

이태리 태생에 덴마크 초등학교를 다니는 열한 살 짜리 딸이 냄새 하나로 발견한 산 마늘을 살짝 데쳐 참기름에 무쳐 김밥을 만들고, 간장 장아찌도 한 병 담았다. 꼭꼭 눌러 김밥을 마는 동안 어릴 적 소풍 가던 날 먹었던 김밥 맛, 참기름 향, 흰밥에 깨소금을 섞는 엄마의 실루엣 같은 것을 떠올렸다. 상추에 산 마늘장아찌 한 장과 삼겹살을 얹어 크게 쌈을 싸서 먹으며, 온 가족이 신촌의 한 고깃집으로 외식 갔던 날과 같은 행복감에 취했다. 

우리가 맛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맛이 담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맛을 꼭 붙들고, 맛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위로를 받으며 다지고, 지지고, 볶아 고향을 간직하는 일에 다시 진심을 다해 본다. 


<작은책> 7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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