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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햇살 Dec 28. 2021

평등과 존중

평등은 공평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동일한 자유가 주어진다. 이것을 평등이라 한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의사로 선택하고 말하고 사고할 자유가 있다. 나이가 많다고 다른 이의 사고를 억압할 수 없으며, 경제적 지위가 높다고 상대의 선택을 제한할 수 없고, 서열이 높다고 타인의 입을 막을 수 없다. 세상을 이루는 n분의 1로서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인식한다면, 나머지 n분의 1을 이루고 있는 이들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자의 몫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상대의 것을 침해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


자유는 때로 제한 없는 자기중심적인 행동과 혼동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다르다. 나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내 방식대로 생각할 권리, 사고할 권리, 결정할 권리, 말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타인의 자유는 그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결정하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자유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만 허용된다.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고 해하는 것은 자유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자유에는 영역의 제한이 있다.


평등은 스스로의 권리를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평등이란 모두가 1/n만큼의 책임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나도, 상대도, 저기 가난한 이도, 저기 부자도, 저기 사랑받는 이도, 저기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 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동등하게 말하고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라면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말할 권리가 있고, 믿는 바를 따를 권리가 있다. 평등은 그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저기 커 보이는 사람과 똑같은 '동등한 크기의 자유로울 권리'를 나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말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당신의 입을 막으려 하고, 당신을 대신해 선택하려 할 때 화를 내고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타인의 입을 막으려 할 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등은 모두가 동등하게 가진 권리를 서로가 알고 지킬 때 실현될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타인의 생각을 휘두르려 하고, 멋대로 바꾸려 하고, 억압하려 할 때도 나는 우리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평등하다는 것은 인간 존재 자체에 위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권리는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등하다. 그것이 평등이며, 이를 알고 남의 것을 침해하지 않고 나의 것을 인지하고 사용하는 데에서 평등이 시작되고 완성된다.





존중은 타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리에 서서 몇 보 떨어져 있는 사람을 바라볼 줄 알아야 타인을 존중할 수 있다.


우리는 의견을 교류할 수 있다. 제 자리에 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보여줄 수 있다'. '보여준다'는 것은 상대에게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선택권이 있음을 알고, 나에게는 말할 권리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자리에서 생각을 다듬고 그가 관심을 가질만한 요소를 넣어 다시 한번 생각을 보여주거나,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누구도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 수 없다. 폭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 폭력이란 물리적 폭력 외에도 권력을 이용하여 굴복시키는 것,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압박하여 굴복하게 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당신이 나의 선을 넘고 있다. 나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나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이렇게 평등에 대해 인지시키는 것, 화를 내는 것.


우리는 오직 자신의 세계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완전한 주도권을 가질 수 다. 오직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자신이 주인이다.


존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은 설득이다. 설득은 상대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동등하다는 것을 알고(평등), 서로의 것을 침범하지 않으며 선을 인지하고 준수하는 것(존중)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며 지켜야 하는 규칙과 같다. 규칙이라는 것은 '원래 그래서' 또는 '예전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처럼 맹목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함께 잘 협동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다름을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선을 인지하고 지켜야 한다. 선을 지키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 타인의 선을 넘어가지 말 것. 그리고 누군가 내 선을 넘어올 때 방어할 것. 그러려면 어디까지가 자신의 세계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타인의 것을 침범하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도 하고, 타인이 내 세계를 넘어왔을 때 곧바로 대응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는 좀 더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것과 타인의 것을. 타인의 것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면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다.


존중은 수용과는 다르다. 이것은 그냥 보는 것이며 듣는 것이고,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을 설득한다면 목적은 오로지 하나다. 내가 그리는 세상을 위해서는 다수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변화를 앞당기기 때문이다. 모두의 동의가 있을 수는 없지만 다수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것이 있는데 세이 전진하지 않는 이유는, 때로 사람들은 더 나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알고 있지만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또는 불편함을 느끼지만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해서 손 놓고 있기도 한다. 나는 필요에 따라 필요한 경우에 필요한 만큼만, 방법의 하나로 설득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상대가 옳지 않은 생각을, 미숙하여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인가?


 답은 그렇다. 나의 생각을 제안했을 때 그가 그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최선을 다해 설득해볼 수는 있다. 다양한 설득의 방법을 사용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멋대로 그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 마치 남의 집에 들어갈 때 문을 열어주길 기다려야하는 것처럼.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듯이. 상대가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질만한 것을 보여줘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옳으니까, 맞으니까, 네가 틀렸고 미숙해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으니까'라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세상이 서열로 이루어져 있다면, 불평등하게 돌아가고 있다면, 그렇다면 세상의 절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아랫 서열이 되어 아랫사람 취급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충분히 바꿀 힘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소신 있게, 하고 싶은 선택을 당당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타인에게 존중받을 권리는 없지만,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자신을 지킬 권리, 부당하다고 말할 힘이 있다. 그들에게는, 우리에게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힘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힘. 화를 낼 수 있는 힘. 거부할 수 있는 힘. 그 과정에서 혼자가 되더라도 결국 나를 지켜낼 수 있는 힘.


공동체는 누구 한 사람의 결정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평등의 앎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 모두가 자신의 지분을 행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타인을 지배하거나 타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반대로 말하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 밑에 있지 않고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말을 따르거나 복종할 의무가 없다. 사람은 모두 자유의지를 가지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말할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생명이기 때문에 가지는 기본적인 권리다.


그래서 존중은, 타인은 나와 '인간'이라는 점이 같을 뿐, 무수한 개체 수만큼이나 다른 점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서 출발한다. 다름은 기본 값이다. 함께 하려면 나의 의견과 너의 의견을 교류할 수 있어야 하고, 차이를 좁혀가며 협상해야 한다. 이는 평등할 때 가능하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말하고 교류할 수 있어야 차이를 인식하고 협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이가 자신의 뜻에 따라 선택한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경계를 넘어 타인의 세계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제 권리인양 군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가라고 말해야 한다. 내가 침해당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강경하게 그를 내쫓을 수도 있다. 혹은 그의 행동이 내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설명하고 나가 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규칙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알았던 몰랐던 그의 사정을 헤아려주는 것은 집주인의 마음이다. 설명해 주는 것이 집주인의 뜻대로 이듯, 설명 없이 내치는 것도 집주인의 뜻대로다. 집주인은 침입자에게 선할 필요도 없으며 악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이 필요한 만큼, 자신이 선택한 만큼의 반응과 행동을 할 뿐이다.



평등은 자유에서 끝나는가? 그렇다면 타인을 혐오할 자유도 있는가?


누구도 타인의 머릿속에 있는 사상이나 취향, 생각, 가치관을 검열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아무리 미성숙하고 못난 가치관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선택이다. '못났다'는 판단은 내 세계에서만 가능할 뿐 그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생각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영역 내의 일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고 의견을 이야기하는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기 내부에서 주어지는 권리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우리는 협동해야 하고 때로 싸우고 부딪히더라도 같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야 한다. 협동은 운명이다. 작게는 옆에 있는 사람들과 협동하고, 크게는 세상을 구성하는 이들과 협동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긴밀히 연결되어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를 배려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다.


혐오는 타인의 존재를 평가하고 판단한다. 그가 존재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칼자루를 본인이 쥐고 있는 양 군다. 그것은 허용되는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평등과 존중을 위배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정적인 공간에서 한정적인 사람과 교류하며 한정적인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살아간다. 같은 것과 비슷한 것은 안정감을 주고, 다름은 불편함과 불안을 야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것을 피하거나 비난하거나 때로 혐오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서는 당신이 이질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다른 이를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이질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일은 특별하지도 드물지도 않기 대문이다. 세상을 여행하다 보면 나와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된다. 문화, 매너, 언어, 사고방식, 생김새, 심지어 도시의 구조와 건물 내부까지. 이 모든 것이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만 오직 이방인인 내게만 낯설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알게 된다.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것들이 있으며 어느 하나 같지 않다는 것을. 내가 경험한 것은 내게만 디폴트일 뿐, 세상에는 각자에게 수많은 디폴트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경험한 것만이 기준이고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야가 좁은 이라고 스스로 밝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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