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에서 살다가 이혼했습니다.
#1 나와 중국인 남편의 한국생활 온도차
6년전
50세대가 넘는 오피스텔형 빌라에서 살고 있던 우리 커플(한국인 여자, 중국 조선족 남자)은 폭등하던 아파트 가격을 이야기할 때마다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외국인 신분이었던 남편은
본인 힘 하나 까닥이지도 않고
그 복잡한 서류 따위도 준비할 필요 없이 새집이 생기니
대한민국의 부동산 시장 경제 따위는 관심도,
그 어려운 글귀들을 읽고 이해할만한 한국어에 대한 문해력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니
냉철한 분석과 판단 따위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쩌다
내 명의로 구입하게 된 새집
오피스텔형 빌라
화려하게 잘 꾸며놓은 분양사무실 겸 모델하우스 201호를 보고
그는 완전 눈빛이 돌아버렸다.
그는 말수가 굉장히 적은 편이고, 표현력이 약한 편이라 뭔가 본인의 기분이 좋아짐을 감추지 못할 때는 입 꼬리를 실죽거리는것으로 모든 언어적 표현을 대신했다.
그것 또한 본인 스스로는 절대 모를 것이다.
본인의 그런 모습을 남에게 들켰다고 알게 되는 순간
그가 나에게 보낼 수 있는 또는 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그 기쁨의 시그널까지
앞으로 볼 수 없게 될지 모르니 ,
나 혼자서 그의 기분과 마음에 드는 정도를 눈치채고 말아야 했다.
'그래 이렇게 마음에 들어 하니,
여기서 신혼생활을 하면 본인도 뭔가 달라진 삶을 살 자신이 있나 보다... 그래 여기도 세대수가 꽤 있으니 아파트처럼 관리도 잘되고,
동네가 좋은 동네이니 집값도 괜찮겠지 뭐...
여전히 이게 맞나..라는 걱정을 갖고서
인생처음으로 난 여러 가지 대출서류를 준비해서
그와 앞으로 살 집을
내 명의, 아니
엄밀하자면 70프로의 은행 담보로 샀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이 분양사무소팀에서 은행연계라며 모셔온 대출상담사가 나에게 진행해 준 주택담보대출은
만기납입형으로 30년 동안은 매달 엄청난 대출이자만 갚아나가는 고금리 상품이었던 것이다.
원리금균등이니, 원금균등이니...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집을 산적이 없으니 전혀 알지를 못했던 것이다.
이건 기우에 불과했다.
역시나 그곳은 나에게
모든 게 불행의 시작이었고 불행의 끝장이었다.
이사 후 한 달도 채 안되어서
난 이 건물의 실체를 너무나 빨리 파악해 버렸다.
왜냐면 내 명의의 집이었으니깐,
층간소음, 날림공사, 하자, 주차문제
건축주 런
이기적인 이웃들
쓰레기투척
입주자대표회장의 잦은 사임
빌라가 갖고 있는 모든 단점의 종합선물세트
그 모든 것에 대한 원망의 화살을 난 여전히 모든 것에 관심이 1도 없는 그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야.
"왜 나 때문이야!!! 집이 그냥 평생 사는 거지, 투자로 사는 거야??
하... 대한민국은 집이 유일한 안전 투자의 지름길인데
이 중국촌놈
그날 201호 모델하우스를 보고 반한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고
나는 그의 어린 시절 그의 시골 고향 동네까지 들먹이며
그의 낮은 안목을 탓을 했다.
여기서 난 남편과 아내라는 성별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배우자라면 이 엄청난 일을 할 땐,
함께 꼼꼼히 준비하고 나에게 미흡한 부분이 있을 때 옆에서 채워주는 역할을 했어야 했다.
그는 그냥
10대 때 가족의 해체 이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리고 새로운 넓은 평수의 집에서 하게 되는 자신의 미래의 삶에 매료된 듯했다.
나는 이때서부터
진정한 대한민국 30대의 모습과 닮아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호갱은 노노이다.
"405호 이쁜이네 부부 이혼했데..
"갑자기?? 왜??
"모르지 뭐, 그냥 삔또 틀리면 하는 거지 뭐
"606호 그 부부들 요즘 왜 안 보이지??
"아 거기?? 얼마 전에 이사하는 거 봤는데 이혼했데
"803호네 어젯밤에 부부싸움으로 경찰 왔데
"단톡 봤어?? 906호 이혼과정 중에 있어서 부부싸움으로 큰소리 났데
남편왈 "그래서 우리는 언제 이혼해??^^
나 "적어도 여기 살고 있는 이상, 이혼 안 해.
난생처음으로 구입한 내 집을 위해
난 이곳의 입주자대표회의 총무였고, 감사였고 대표님의 딸랑이로써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처단하고 비난하는데 앞장서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남들 입에 백 프로 오르내리는 그런 짓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여러 번 억지로 끌고 나간 입주자 회의와 모임을 통해
웬만한 세대주들은 알고 있던 남편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집을 구매할 때처럼, 그런 어리바리함은 두 번 다시없다는 듯
늘 살면서 답답했던, 한국어만 통할뿐
그 외 모든 것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던 그와의 이혼은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고 꼼꼼하게 준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