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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멜리싸 May 19. 2024

국제결혼으로 남편을 한국으로 모셔오자

#3. 서류 들고 생애 최초 혼인신고

그는 말했다.

"잠깐이면 돼. 요즘은 한국비자 새로 받아 오는 거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고 돈만 주면 다 돼."


왜일까.. 특유의 중국교포 사투리였지만 언제나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그의 한국어 표현은

나에게 큰 마음의 위로나 위안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설탕이 듬뿍 발린 표현들로 여자들에게 배신감 또는 뒤통수라는 최후의 이미지를 주고 떠나는 먹튀남과 다르게

전혀 수다스럽지 않은 그가

오히려 남자답다고 느껴졌다. 내 남자는 다르다고


9개월이라는 연애기간 동안, 그가 내 곁을 떠나는 순간은

일하러 갈 때 또는 집 앞 편의점에 4+1 행사하는 맥주를 사기 위해

환한 웃음을 짓고 현관문을 나설 때 밖에 없었는데,

마치 그때처럼 그렇게 "나 다녀올게! 라며 중국에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내던 10평짜리 작은 원룸형 오피스텔에는

처음 나의 방에 입성할 때처럼 단출했고 모든 게 귀찮았던 그의 모습처럼

그가 중국으로 떠나고 난 후, 내 방의 모습은 마치 그를 만나기 전과 같이 오직 나의 흔적들로만 남겨져 있었다.

다만 달라진 건

내가 2개월 후면 생애 처음으로 내 명의의 집으로 입주를 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 마련한 그 집


짧고 짧은 연애 경험은 많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약속한 진지한 교제도, 장거리 연애에도 익숙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나에게도 별의별 연애를 다 경험해 보는 날이 오는구나 싶어

인내와 함께 마치 꽤나 현명하고 차분한 여자친구가 되어 그에게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그는 중국으로 들어간 첫날은 오래간만에 고향친구들을 만난 기쁨으로 술에 취해 있었고

둘째 날은 숙취로 인해 뻗어 있었고, 또 그날밤은 저녁식사를 위해 친구들과 모였는데 당연히 중국 동북사람들의 스타일대로 술과 함께였다.

오래간만에 전화통화가 되는 날엔

언제나 누워서 잠결에 전화받는 그였지만

그래도 가끔씩 전해주는 그의 "보고 싶다..

이 한마디에

나는 '아..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긴 구나' 라며

그의 그런 간단 명료한 표현 

마치 그동안 내가 이루지 못했던 완전한 사랑에 대한 숙제를 해나가는 듯

외롭고 쓸쓸하면서 그리고 심심했던 내 마음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한 달이 흘러

그에게 전화가 왔다

"비자가 잘 안 될 것 같아.

"왜?

"아 몰라

"아니 왜 몰라?? 말을 해봐

" h2 비자로 입국했다가, 관광비자로 갔잖아 그런데...


아 도통 뭐라는 지 모르겠다.

난 가끔은 그의 대화 능력에 다소 내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건

한국어와 중국어 사이에 언어적 표현에 차이가 있어서라 생각해서

차라리 어려운 문장들은 중국어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중국선양이라는 중국교포(조선족) 동네에서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는 그의 중국어 실력은,

학창 시절을 중국에서 보낸 나의 돈 들여 배운 중국어 실력보다, 문장을 표현할 때 구체적인 표현 방법은 늘 부족했던 것 같다.

차이라면 중국의 수많은 지역의 사투리 방언을 나는 못 알아듣고 그는 자연스럽게 알아듣는다는 것 빼고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건 그냥 상황을 바라보고 그걸 상대방에게 표현할 때 관점의 중요성 여부였고

서로의 성격이 달랐고, 한국어와 중국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여부의 차이였다.


2달이 흐른 뒤

그는 '가지고 간 돈이 없다,,라는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다니면, 식생활만 할 경우 가지고 간 돈이 적지 않은 금액인데 벌써 다 써버렸냐며 중국 선양과 서울이라는 원거리 사이에서 핸드폰 스피커에게 답답함을 표현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다 썼다... 였다.


그렇게 집을 계약하고

이사와 집기 및 가구 구입을 위해 비축해 두었던 통장 잔고는

중국 시골에 갇혀서 한국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그의 생활비로 밑 빠진 독처럼 빠지게 되었다.

--원래 그는 그가 살던 곳으로 돌아간 것인데 말이었다.--

이때부터 격주 간격으로 그에게 돈을 송금해 줄 때, 쿨하지 못한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를 사랑하거나 그를 동정하는 것


그도 내가 무척 그리울 것이며, 건물에 아무도 살지 않아 난방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먼지 가득 덮인

방치된 고향집에 들어가서 본인은 더 더 더 너무나 괴로울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9개월이라는 연애 기간을 통해 이미 그는 나의 남자였고

때론 마치 직접 낳아보지도 않은.. 그러나 마음으로 낳은 자식 같았고

그래서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간과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난 나를 엄청 좋아해 주는 이 남자가 빨리 한국에 돌아와서 예전처럼 늘 똑같이 나만 바라봐주고, 나만 기다려주는 '원래의 위치'로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가 빠르게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결혼 비자'


진짜 결혼에 대한 갈망이 아닌

그가 빨리 나의 위치로 돌아와서 비어진 원래의 내 마음속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방법

나의 이런 지극히 감성적인 욕구속에

그렇지 못한

국가 행정시스템인 '결혼비자' 발급을 통해 그를 다시 부르자!!


" 나 너 있는 중국선양으로 내가 갈게, 그리고 결혼비자 하면 빠르면 1달 내로 비자가 나온다고 하니 너 그렇게 해..


나의 말속에는 '우리 그렇게 하자... 가 아닌

'너 내 말 듣고 그렇게 하자'라는 일방적 통보만 있었을 뿐,

그의 의견은 없었고 '결혼'이라는 그것은 서로에게 풍습이나 의식이 아닌 서류로 서둘러 처리해야 하는 '생애최초 혼인 신고' 결재와 같은 것이 되었다.

하얀 원피스나 드레스가 아닌

겨울철 두꺼운 오버점퍼와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서 나는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해 서둘러 중국 선양으로 갔다.





#4탄에 중국 선양에서 혼인신고후 결혼비자 발급과정에 대한 스토리가 공개됩니다.



-->지극히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쓰는 과거형 일기(에세이)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식의, 저를 비난하는 말투의 댓글이나 국적 관련 비방의 댓글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제 글을 관심 있게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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