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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쟁이 Apr 06. 2024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지향하는 이유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어릴 적 나와 동생은 외할머니 댁에 맡겨져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장미 농원을 경영하고 계셨다. 집에서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큰 비닐하우스가 있었고 그 안에 들어가면 새빨간 장미꽃이 가득했다. 아쉽게도 냄새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이 줄지어 서있는 풍경은 기억난. 할머니는 하루 낮 시간 대부분을 농원에서 보내셨고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오셨다. 적막한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 지루하면 가끔씩 비닐하우스를 들어가 거닐었다. 사실 그때도 장미꽃 자체에 큰 감흥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장미꽃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였을까. 어렸던 나한테는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비닐하우스 안 흙바닥을 기어다니던 달팽이와 개미가 더 눈에 들어왔던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흙과 가까이 살 일은 많지 않았다. 가끔씩 현장학습을 가서 고구마를 캔다거나 대학 때 농활을 가서 잡초를 캔 적이 있지만 어쩌다 한번 있는 이벤트였을 뿐이다. 가드닝이 쉽지 않은 취미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고서야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기억에서 외할머니는 유독 비닐하우스 안에서 늘 허리를 굽히고 계셨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가드닝은 취미라고 하기엔 퍽 지난한 것 같다. 항상 모자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그걸 수습해보려 하면 다른 것이 또 눈에 밟힌다. 아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오래된 밈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분야도 드물 것이다. 책 전반적으로 가드닝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런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8월의 휴가철이었다. 잠시 휴가를 떠난 정원 주인은 정원 주인대로 자신이 일러줬어야 할 온갖 것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새로운 식물에 눈이 돌아가서 긴급 우편으로 씨앗을 보낸다. 가엾은 친구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보지만 그의 최선이란 정원 주인에게는 차악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도 친구가 굉장히 착한 사람이니까 가능한 일인 것 같고 에라 모르겠다, 하며 때려치는 게 보통이지 싶다. 모르긴 몰라도 정원 주인이 휴가를 떠나지 않고 계속 정원을 돌봤어도 친구의 퍼포먼스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원가들이 왜 가드닝에 몰두할까. 아마 정원가들에게 꿈에 나올 것 같은 이상적인 정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상상 속에만 존재할 뿐,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실제 일궈낸 정원은 상상 속의 완벽한 정원과는 억만 광년쯤 차이가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노력한 결과물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데서 오는 희열은 거기에 들어가는 노고를 잊을 만큼 짜릿할 게다.


나는 좋은 글을 쓰는 게 목표인 사람이다. 더없이 단순하면서도 더없이 갈 길이 먼 목표다. 직업으로도 글을 쓰고 취미 생활의 일환으로도 글을 쓰지만 대부분의 글이 쓰고 나서 읽어보면 성에 차지 않는다. 아마 내가 상상하는 완벽한 글을 쓸 수 있는 날은 내 생애를 통틀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 한다. 정원가가 채소, 과일을 키우는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듯 나는 나의 글을 계속 써보려 한다. 정원가가 정원을 가꾸듯 글도 많이 써야 는다. 언젠가 미래에 문득 내가 쓴 글을 읽고 그래도 내가 이 정도의 글은 쓸 수 있게 됐구나, 고개를 끄덕일 때가 온다면 나도 정원가들의 희열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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