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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흔적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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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Oct 27. 2024

흔적 (2)

2.


중학생이 되어 처음 맞는 여름방학이었다. 원인 모를 어지럼증으로 보경은 며칠 앓아 누웠다. 엄마와 가까운 종합 병원에 방문했다. 의사는 보경에게 이석증 진단을 내렸다. 경과를 잘 지켜봐야 한다면서 입원을 권했다. 보경 엄마는 딸을 6인 병실에 일주일간 입원시켰다. 병실에는 보경까지 다섯이 있었는데 보경이 들어온 날 두 사람이 나가고 다음날 한 사람이 또 나갔다. 보경은 문간에서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병실에는 보경과 보경 맞은편 백 할머니만 남았다. 백 할머니는 인상 좋은 사람이었다. 흰 머리 섞인 짧은 파마 머리가 푸근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보경과 눈이 마주치면 할머니는 상체를 앞뒤로 살랑이며 미소를 지었다. 내려간 눈꼬리가 온화한 기운을 더했다. 병실 바깥에서 엄마는 백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종종 꺼냈다. 참 인상 좋은 분이야. 나이 먹으면 얼굴에 산 세월이 묻어나는 법이거든. 너도 저렇게 환하게 살아야 돼. 보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갸웃했다.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또렷한 감각이었지만 어린 보경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이름 붙이기 어려웠다.


처음 이틀 동안 보경은 커튼으로 침대 주변을 꽁꽁 둘러싸고 지냈다. 낯선 어른 여럿과 온종일 한 공간에 있는 게 어색했다. 입원 환자들은 대체로 나이가 있는 편이었다. 갓 중학생이 된 여자아이가 입원하게 된 연유에 관심들이 많았다. 말 많던 셋이 우르르 나가고 할머니와 둘이 남게 된 다음부터는 잘 때만 커튼을 쳤다. 백 할머니는 끊임없이 말을 걸거나 오지랖을 부리는 유형의 어른이 아니었다. 오히려 좀이 쑤신 보경 쪽에서 할머니를 관찰하곤 했다. 커튼을 절대 치지 않아서 무얼 하든지 훤히 들여다보기 좋았다. 할머니는 늘상 별일 없이 침대에 앉아만 있었다. 다른 노인들처럼 성경책을 읽거나 손뜨개를 하지 않았다. 간호사나 의사 지시에 따른 것 외에는 자기 전까지 할머니가 누워 있는 모습을 보경은 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산책도 거의 나서지 않았다. 누가 먼저 말을 걸거나 찾아올 때가 아니면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침대를 바짝 세워 기댄 자세로 식사용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리고 종일 창 밖만 바라봤다. 가끔 두 개로 겹쳐놓은 종이컵에 크흠 크흐흠 돋워 낸 가래를 뱉어낼 뿐이었다. 할머니는 프레임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침대 상단을 세우거나 눕힐 때 가장 많이 움직였다.


보경은 입원 첫 날 밤을 떠올렸다. 끽끽대는 소음에 자다가 깼다. 핸드폰 액정을 두드려 보니 새벽 다섯 시였다. 커튼을 슬쩍 들췄다. 퍼런 어둠이 묻은 사람 윤곽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였다. 쪼그린 자세로 손잡이를 돌려 침대를 세우고 있었다. 창밖은 깜깜했다. 소리에 예민한 보경 외에 아무도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엄마도 보조 침대 위에서 새우처럼 웅크린 자세 그대로였다. 보경은 무릎에 담요를 얹어 두고 앉았다. 소리가 멎기를 기다리다 다시 잠에 들었다. 아침밥을 먹고 병원 주변을 걸으면서 새벽에 있던 얘기를 하자 보경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할머니가 밤잠이 없으신가 보다, 했다. 둘째 날, 셋째 날에도 보경은 끼릭 끼릭 소리에 자다가 한 번씩 깼다. 시간은 어김없이 다섯 시였다. 보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손등을 갖다 댔다. 할머니가 침대를 다 세울 때까지 기다렸다. 고작 몇 분이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나서 다시 잠을 청했다. 엄마 말처럼 그러려니 하기로 마음먹었다.



보경 엄마는 보경과 함께 계속 병원에 있었다. 사흘 내도록 꼭 붙어 딸을 돌봤다. 지쳐 보이는 엄마에게 보경이 이제 괜찮다고, 세 밤만 더 자면 되니까 오늘부터는 집에 가서 자라고 설득했다. 민혁이랑 아빠도 가서 좀 챙겨 엄마. 보경의 말에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니 동생이나 아빠나 신 났지 왜. 하루죙일 게임만 해도 뭐라 할 사람도 없고, 니 아빠는 술 마신다고 눈치 줄 사람도 없고, 아주 살 판 났지 그냥.


그러면서도 집안 돌아가는 꼴이 아주 걱정되는 눈치였다. 가 엄마 가, 집 가서 자고 내일 오후에나 와. 안 와도 되고. 보경은 엄마를 설득했다. 한참 승강이를 벌인 끝에 엄마는 못 이기는 척 꼬리를 내렸다. 알았어 그럼. 엄마 잠만 자고 올테니까 이따 저녁이랑 내일 아침 밥 나온 거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돼 알겠지, 보경 엄마는 끝까지 못마땅한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보경은 내쫓듯이 엄마를 보냈다. 마지못해 짐을 챙겨 나서면서 보경 엄마가 백 할머니에게 선생님 저 집 다녀 올게요, 인사했다. 할머니가 미소지었다. 상체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살랑살랑.


보경은 슬리퍼를 신었다. 일어나서 주변을 정리했다. 보조 침대 위 담요를 갰다. 창틀에 둔 책과 옷가지 등을 가지런히 재정렬했다.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냉온수기에서 물을 한가득 떴다. 물통을 내려놓은 뒤 보경은 침대를 등지고 섰다. 더 할 일이 없었다. 팔을 위로 쭉 뻗으며 하품을 했다. 환자복 소맷자락이 팔꿈치까지 헐렁헐렁 내려왔다. 머리를 고쳐 묶으면서 바깥을 봤다. 꺾어진 병원 건물 외벽이 왼편에 보였다. 그 위로 죽 늘어선 창에 맞은편 키 큰 오피스텔이 비쳤다. 병원 앞 2차선 도로에 면한 암회색 건물이 정면 시야를 가로막았다. 도심 속 병원은 전망이랄 게 없었다. 할머니가 하루종일 뭘 보는지 보경은 정말로 궁금했다. 할머니는 허공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 같았다. 무얼 낚고 싶은지 왜 낚으려 하는지 지켜보는 사람은 이해할 방도가 없었다. 보경은 시선을 거둬들였다. 침대를 직각에 가깝게 세워 앉았다. 책을 붙들어 펼치고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금세 따분했다. 엄마는 라디오처럼 말이 많았다. 좋든 싫든 지루할 틈을 주지는 않았다.


너 경희 이모 기억 나지. 여기 이사오기 전전 집 앞집에 살았잖아. 그 이모 딸, 저기 누구야, 아름이 응. 아름이가 이번에 연세대 들어갔대잖아. 오랜만에 전화 와서 잘 지내냐길래 뭔 일인가 했다니까. 근데 결국 딸래미 자랑질 하려고 전화 한 거지 뭐. 나는 우리 딸 서울대가 아니라 하버드를 가도 그렇게 안 할텐데 그치. 근데 넌 대학 가고는 싶어? 어디 가면 좋겠다 생각해 본 데는 있어? 요즘 애들은 일찍부터 그런 거 생각해 둔다던데 느네 친구들끼리는 그런 얘기 안 하니? 너 더 어렸을 때는 막 패션디자이너 한다고 그랬잖아. 지금은 아니지? 대학 이름도 좋은데 과가 중요해 과가. 정확히 뭐 하고 싶은 지 지금부터 탐색을 잘 해야 돼. 3년 4년 금방 간다 야. 너 금방 고등학생이야. 뭐든 니가 하고 싶다면야 엄마아빠가 지원은 해 줄거지만은 운동이나 예체능 쪽은 조금 더 생각을……


보경은 거의 잠에 들 뻔했다. 제 손으로 놓아 버린 주파수를 다시 헤집다 초점이 흐려졌다. 멍해지던 시야에 어떤 움직임이 걸렸다. 까딱 까딱. 백 할머니가 보경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보경은 입을 벌려 두고 할머니를 봤다. 에. 할머니가 포근한 얼굴로 손을 계속 까딱였다. 보경이 여전히 에, 하는 표정을 했다. 할머니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과자 봉지가 손가락 끝에 매달려 달랑거렸다. 보경이 침대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갖고 가서 먹어. 할머니는 웃으면서 보경 손에 쿠키가 든 과자 봉지를 세 개 들려 주었다. 고맙습니다, 보경이 인사했다. 할머니 주변에는 항상 과일, 과자 봉지, 음료수 박스 등이 널려 있었다. 할머니는 한 개도 스스로 소비하지 않았다. 먹을 게 생기면 병실을 돌면서 전부 주변에 나눠 줬다. 보경에게도 과자니 과일이니 음료수니 하는 것을 지금처럼 꾸준히 들려주었다. 조용히 손짓으로 불렀다. 나는 잘 안 먹어 이런 거. 사 온 사람한테 다시 들려 보낼 수도 없고. 너 가져가서 먹거라 한창 클 때니까. 보경은 또래 친구만큼 간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먹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병원 밥을 세 끼 다 먹어야 하는 것만으로 힘들었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건네는 간식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잘 받아 두었다. 꼭 그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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