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용어 사용은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
[박규서의 보험회계 탐방-3]
2024.11.4
박규서 (외국어대/건국대 겸임교수, 경영학박사, 공인회계사, 보험계리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어를 통하여 다양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동일한 단어라도 분야와 목적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법률이나 회계기준과 같은 영역에서는 주요 용어의 정의를 그 분야와 목적에 맞게 명확히 설정하고 이를 해당 법률이나 회계기준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또는 ‘대주주’와 같은 용어는 일상적으로 익숙하게 쓰이지만, 세법 등 특정 법률에서는 그 용어가 해당 법률 목적에 따라 특정 정의에 따라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도 IFRS17(국내에서는 K-IFRS 제1117호라고 하지만 편의상 IFRS17로 언급하겠으며, 이하 다른 기준도 동일한 형식으로 표시함)을 오랜 준비 끝에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2024년이 끝나가는 지금도 보험회계와 관련하여 업계와 언론에서 여전히 잘못 사용되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시가(market value)’이다. 예를 들어 기사 등에서 IFRS17을 적용하면 보험계약과 관련된 부채나 자산이 ‘시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는 식의 표현이 종종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용어 사용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제회계기준(IFRS)에는 ‘시가’에 대한 용어가 명시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즉, 국제회계기준에 없는 용어이다. 국제회계기준 중 공정가치를 다루는 IFRS13 기준서에서는 ‘공정가치(fair value)’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공정가치를 측정일에 시장참여자 사이의 정상거래에서 자산을 매도할 때 받거나 부채를 이전할 때 지급하게 될 가격’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이것이 보험계약과 관련하여 기사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가’와는 다르다.
둘째, 보험회계인 IFRS17에서도 ‘시가’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보험계약은 IFRS17에서 이행가치(fulfillment value)로 측정된다. 재무회계 개념체계에 따르면 이행가치(fulfillment value)는 기업이 부채를 이행할 때 이전해야 하는 현금이나 기타 경제적 자원의 현재가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행가치에는 거래상대방에게 직접 지급할 금액뿐만 아니라, 부채 이행을 위해 다른 당사자에게 지불할 것으로 예상되는 금액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행가치는 기업 특유의 가정을 반영하며, 미래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측정된다.
비록 ‘공정가치’나 ‘이행가치’라는 복잡한 개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요점은 IFRS는 보험계약에 대하여 ‘시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특히 보험계약에 대하여는 일반인들이 ‘시가’로 오해할 수 있는 ‘공정가치’도 아닌 ‘이행가치’로 측정해야 한다. 따라서, 오랜동안 보험산업뿐만 아니라 기사, 논문 등에서 IFRS17 도입으로 ‘시가’ 정보가 제공될 수 있다고 하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용어의 사용은 개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필수적이다.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언어의 한계는 곧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말했듯이 언어의 정확성이 이해의 깊이와 사고의 범위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언어를 100%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나 자신을 포함해 누구에게나 쉽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법률이나 회계기준 등을 적용하고 이를 해석하여 의사결정을 내릴 때는 용어의 정확한 이해가 중요하다. 특히 그것이 어떤 제도의 근간과 연결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보험회사의 정보를 대중이나 투자자들이 ‘시가’로 요구한다면 또는 그 정보가 중요하다면, 보험회사나 감독당국 및 언론은 현재 보험회사가 제공하는 정보(예를 들어 ‘이행가치’)와 대중이나 투자자가 요구하는 ‘시가’의 차이에 대하여 과연 제공할지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하여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IFRS17에 의한 정보가 ‘시가’라고 잘못 표현된다면, 이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그를 통한 발전의 가능성은 과거 오랜동안 그랬던 것처럼 차단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IFRS17에 의한 회계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재무제표가 시장에 공시된다고 하면 그 수치가 ‘시가’라고 할 수 있나?”라고 질문한다면 과거에 IFRS17에 의하여 시가 정보가 제공될 수 있다고 한 이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거나 애매모호한 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IFRS17 하의 보험계약 관련 재무제표상의 금액은 회계기준에 근거한 특정 가치 측정기준에 따른 수치이지 이는 그 회사의 실질가치 또는 시장가치와는 다를 수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우연히 비슷하거나 같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극히 낮거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시가’라는 하나의 단어를 예로 들어 보았지만 보험산업도 자신들의 귀중한 회계정보체계를 안정화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핵심 용어와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수십 년간 보험회사뿐만 아니라 많은 회사와 산업을 나름 경험하면서 미시적인 작은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회계적으로 회사나 산업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일상 업무에서는 상식이라고 간과하기 쉬운 기본 개념에 대한 것들이었다. 내가 경험한 IMF 금융위기 이후 활성화된 M&A 사례에서도 회계적으로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거의 대부분 회계의 기본 개념 또는 시각에 따른 부분이었다.
‘시가’라는 용어는 언론기사 등에서 일상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업계 등에서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는 점은 문제다. 또한 이행가치, 공정가치라는 개념을 떠나 과연 현재 보험산업은 시장에 ‘시가’를 제공하는가? 이와 같은 불분명한 용어 사용은 현재 보험시장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한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있다.
다소 딱딱한 용어 정의에 대한 주제이기에, 이번 글의 마무리는 김춘수 시인의 ‘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 꽃 –
시인: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