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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Aug 12. 2024

앙코르와트에 다시 간다면

여행 속 영화, 영화 속 여행

 2018년에 6월 베트남은 너무 더워서 원수끼리만 간다는 말에 깔깔 웃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 씨엠립까지 갔을 때였다. 씨엠립의 습한 공기 탓인지 시간의 완력 때문인지, 앙코르와트는 푸른 이끼가 사원의 검은 돌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과 지열로 빨갛게 달아오른 양볼로 그늘을 찾아서 앙코르와트의 모퉁이마다 자주 기대었었다.


 그곳은 한 번에 다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여러 번 찾아가 조금씩 두고두고 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하루 동안의 짧은 일정으로 인상은 강렬했으나 캄보디아어로 된 사원의 이름들은 입에 잘 붙지 않았다. 그곳을 좀 더 보고 싶다는 아쉬움으로 내 가슴속에 미완의 장소로 남아있었다.



 홍콩의 비좁은 골목길과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주인공 남녀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장면이 반복된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두 사람의 사랑을 그린 영화 ‘화양연화’. 주인공 장만옥과 양조위의 연기를 숨죽이고 지켜보다 갑자기 앙코르와트가 몹시 그리워졌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양조위는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밀을 봉인하는 방법으로 사원의 벽돌 틈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돌아선다. 사원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돌아서는 행위는 비밀을 털어놓으며 마음을 비우는 일인가, 자신만이 아는 곳에 비밀을 남겨두는 일인가. 나는 후자라고 믿었다. 누가 힘주어 가슴뼈를 뻐근하게 벌리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몇 년 전에 갔던 앙코르와트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화양연화 스틸컷>​


 2023년 10월, 다시 앙코르와트를 찾은 때는 비행기가 프놈펜에서 내려 씨엠립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앙코르와트에 다시 간다는 설렘으로 눈이 멀어 패키지 일정표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탓이었다. 낡고 좁은 버스는 예전부터 아팠던 허리에 묵직한 통증을 선물했고 나 자신이 수행 중인 수도승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찬란한 사원과 재회하려면 마땅히 그 정도의 고행은 겪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았다.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니 통증이 덜해졌고 비로소 차창 밖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록빛 논과 연꽃이 피어있는 웅덩이와 미나리꽝이 있었다. 버펄로나 물소가, 해먹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졌다. 똑같은 풍경이 달리는 버스를 따라오고 있었다. 우기였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여섯 시간의 긴 버스 여행 끝무렵에 하루가 저무는 풍경을 만났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마다 캄보디아에서 흔히 보이는 탑 장식으로 꾸며진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일본의 도리이나 사찰의 해탈문과 비슷해 보였다. 일상 속에 신앙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벌레와 뱀이 올라오지 못하고 뜨거운 지열을 피할 수 있도록 나무 기둥 위에 지어진 단출한 이층 집이 캄보디아인의 삶을 엿보게 했다. 삽짝 옆에 소꼴을 한 무더기 베어다 놓고는 우물우물 풀을 씹는 소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농부가 보였다. 검은 염소나 흰 소나 분명 풀을 뜯고 있으나 하나같이 비쩍 말라있다. 가축이 먹는 풀에 찰기가 없어 보여 창밖으로 스치는 소들의 순한 눈빛을 안쓰럽게 돌아보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찾아간 앙코르와트는 거대하고 기괴한 수펑나무 뿌리가 그 사이 더 크게 자라서 사원의 이곳저곳을 움켜쥐고 있었다. 앙코르와트의 1층 회랑을 느리게 걸으며 힌두교의 전설을 담고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부조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바람과 사람의 손길에 닳아서일까, 부조 속 고깔모자를 쓴 왕과 전사들도, 코끼리도 어느새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온다면 또 어느 곳이 오늘의 풍경과는 달라진 모습이 되어 있을까.


폐허 사이 시간의 이끼에 덧대어진 사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 다녔다. 타프롬에서는 나무가 붙들고 파고드는 유적들이 더는 파괴되지 않기를 바랐다. 해자에 비친 사원 안을 걸으며 여러 번 넋을 빼앗겼으며 어김없이 감탄했다.

 앙코르와트의 해자를 건너 앙코르 톰으로 갈 때는 여전한 더위 탓에 현지인이 운행하는 뚝뚝이를 타고 이동했다. 뚝뚝이에 앉으면 신기하게도 어디선가 태양빛을 가르며 바람이 다가왔다. 바람의 호위를 받으며 달려가다 멈추면 신기하게 바람은 연기처럼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원에 스며든 엄숙함에 물질은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사원을 보고 나와 뚝뚝이에 오르면 바람이 다시 돌아와 망토처럼 둘러졌다. 사원 안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향해 절대적인 경의를 표하도록 요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건 억지 강요가 아니라 잔잔한 물결이 스르르 발밑을 스쳐가듯이 저절로 그리하도록 만든다는 느낌이었다.


 인생도 그렇듯 여행에도 늘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전에 왔을 때 보았던 스펑나무 사이의 부처 얼굴을 찾다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몇 년 전 태풍에 무너져 없어졌다고 한다. 나무 사이에 숨은듯한 부처의 형상은 온화하면서 신비로와 보여서 함께 간 친구 진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몹시도 아쉬웠다.


 바이욘 사원의 크메르의 미소라 불리는 거대한 얼굴상들도 전에 왔을 때보다 심하게 일그러져 보여서 안타까웠다. 예기치 않은 행운은 전에 가지 못한 피메아나카스사원과 바푸온 사원까지 보게 된 일이었다.


 피메아나카스는 앙코르 톰 왕궁 중앙에 피라미드 형태의 붉은 석재로 이루어진 사원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원의 정상에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이 살았고 밤마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왕은 자신의 침소에서 잠을 자기 전에 이 여인과 먼저 동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왕이 죽거나 큰 재앙이 따른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고 했다.


 왕과 왕비가 거주하던 왕궁 내에 비밀의 사원이 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도 온전하게 비밀을 숨기거나 기도할 혼자만의 장소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크메르인의 뱀에 관한 전설과 왕궁의 비밀이 낡은 사원의 틈마다 스며있었다.  밤의 사원 풍경이 궁금했다.


 바푸온 사원은 다른 곳에 비해 더 심하게 파괴되어 아직도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친구 진은 무섭다고 끝까지 오르기를 포기해서 나만 혼자 가늘고 긴 나무 사다리에 의지해 3층까지 힘겹게 올라갔다.


붉은색 사암 벽돌 틈에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꼭대기에는 뼈대만 남은 석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넘나들고 있었다. 주변의 키 큰 나무와 잔디밭 사이 유물들이 여기저기 누워있고 그 사이로 원숭이들이 한가롭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회랑의 돌틈에 촛불에서 녹아내리는 촛농 같은 비밀을 넣어 봉인하고서야 마침내 계단을 내려왔다. 그곳에 묻어두고 싶었던 나의 비밀은 일생 동안 누군가를 죽을 만큼은 사랑하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마음이었다.


영화 속 양조위가 돌에게 말을 거는 심정이 헤아려진다. 못다 이룬 사랑이 그리운 날이면 참을 수 없는 가려움처럼 마음을 두고 온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 진다.

                         <화양연화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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