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서로 다른 도시의 숨겨진 인연을 찾아내는 마술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2015년에 캐나다 동부 여행 중에 퀘백을 건설한 사무엘 드 샹플랭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2019년에 남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항구도시 옹플뢰르를 여행하다 사무엘 드 샹플랭의 조각상을 만났다.
조각상 아래에는 샹플랭이 캐나다를 탐험하다 1608년에 퀘백을 건설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곳이 그 남자가 퀘백을 건설하러 떠난 긴 항해의 근원지였구나! 감탄과 함께 신비로움을 느꼈다.
우레시노 여행 중에 인근의 다케오 시립도서관도 그렇게 찾게 되었다. 서울의 스타필드 코엑스몰 별마당도서관이 다케오 시립도서관을 벤치마킹해서 만들어졌다니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건축학도들의 성지로도 불린다는데 대체 어떻게 지어졌는지도 궁금했다.
우레시노에서 온천욕을 하고 나면 마을의 골목길 사이사이로 걸어 다니며 시간을 느리게 흘려보내던 중이었다. 우레시노 시외버스터미널의 매표소 직원은 다케오 시립도서관에 가려면 도서관 맞은편에 있는 유메 쇼핑타운에 내려서 건너가는 게 편하다고 알려주었다.
왕복 티켓을 신청하니 돌아올 때 쓸 티켓을 약봉지로 쓰는 조그만 비닐 지퍼팩에 담아 공손하게 건넨다. 시오타 강변에서 만난 우편배달부에 이어 또 한 번 감동이 밀려온다. 자그마한 온천마을이 점점 좋아져서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바삭한 패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여간다.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출발하기 전부터 들뜨게 해서 설레는 기분으로 버스에 올랐다.
시외버스지만 한국의 마을버스 정도의 크기에 내부에 게임 캐릭터가 장식된 작고 귀여운 버스다. 가는 길에 들르는 정거장에서 가끔 노인 승객들만 느리게 버스에 오르고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우레시노에서 시외버스를 탄지 사십여 분 만에 다케오시도서관에 닿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맞은편에 다케오 시립도서관의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책꽂이에 책을 가득 꽂아놓은 모습 같기도 하고 책을 잡고 페이지를 찾을 때 책갈피가 펼쳐지는 모습처럼 보였다. 회색의 긴 막대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있고 흰색 글씨로 다케오시도서관이라 쓰여있다.
정면에서 볼 때 뒤편에 세워둔 간판에 BOOK이라 쓴 글씨가 비치듯이 겹쳐 보이게 만들어졌다. 책갈피를 펼칠 때 손끝에 종이가 스치며 내는 기분 좋은 바람처럼 간판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이 느껴진다. 주변 풍경과도 잘 어울리는 자연 친화적인 디자인이다. 수많은 고민 끝에 도서관과 잘 맞는 이미지로 완성된 흔적이 보인다.
붉은 벽돌로 둥글게 쌓은 건물과 밖으로 돌출된 창이 보이는 날렵한 회색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은 쇠퇴해 가는 도시를 살리기 위한 문화재생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도서관이다. 인구 5만 명이 채 안 되는 도시가 매년 100만 명이 방문하는 관광지로 변모한데는 이 도서관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한다. 일본 내 최대 서점 체인 기업인 ‘츠타야(TSUTAYA)가 위탁 운영을 맡으며 다케오 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다.
방문자가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고자 자연 채광을 들이고 숲속 도서관 같은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로 꾸몄다. 책을 진열하는 방식도 기존 일본의 서적 분류법이 아닌 고객의 욕구를 반영하여 책을 통해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식이다. 서적은 물론 의류와 소품도 판매하고 내부에 스타벅스가 함께 있다.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 음료도 마시고 다양한 문화체험이 가능한 공간으로 꾸며져있다.
나무로 둘러싸인 도서관 내부와 천장을 보자마자 아!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채광을 위해 빗살 무늬 장식처럼 꾸며진 흰색 원 안에 세밀하게 조각된 두 개의 목재 원형이 겹쳐져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독특한 건축과 책이 가득한 실내 인테리어도 멋있었고 무엇보다 그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진 촬영이 가능한 지점을 일층과 이층에 한 곳씩 정해두고 그곳에서만 사진을 찍도록 직원이 안내한다.
어떤 이들은 일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마시며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책을 읽고 있다. 서가 사이로 둘러보며 책을 고르는 이들도 보인다. 경제, 국제/정치 등 분야별로 구분되어 있는 열람실은 검은색 원형 천장 아래 둥그런 책꽂이가 내부를 채우고 있다. 그 안에 나무로 만들어진 둥근 칸막이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그들의 구부린 등까지 둥그런 곡선을 더해 도서관 전체의 분위기가 매우 편안해 보였다.
별마당도서관에 다케오 시립도서관이 어떻게 반영됐는지 보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 코엑스몰 별마당도서관과 최근에 문을 연 수원 스타필드 별마당도서관에 다녀왔다.
별마당도서관의 까마득하게 높은 서가에 꽂힌 책들은 멀리서 반짝거릴 뿐 만질 수 없는 별처럼 장식용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름이 별마당인가?)
수원 스타필드의 별마당도서관은 네 개 층을 관통하는 서가에 우주를 표현한 장식까지 더해져 환상적이고 미래 지향적으로 보였다. 상업적인 공간을 할애해서 도서관을 만들고 그곳이 명소가 되도록 멋지게 꾸민 점은 좋았다. 다만, 화려한 조명과 번잡한 소음으로 책을 읽기는 쉽지 않았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다케오 시립도서관의 서가가 수평적이라면 별마당도서관은 수직적으로 보였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이 좀 더 도서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생각이다. 너무 높지 않은 책꽂이 사이로 걸어 다니며 다른 언어의 책일지라도 이것저것 손을 뻗어 읽어보고 싶게 했다.
도서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영국 런던의 서점이 배경인 영화 ‘노팅힐’이 생각난다. 런던의 아기자기한 노팅힐 거리에 가면 ‘THE NOTTING HILL BOOKSHOP’이라 적힌 파란색 간판의 서점이 있다. 1981년에 문을 연 이 작고 감성적인 서점은 영화 ‘노팅힐’이 만들어지는데 영감을 제공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The Travel Book Co’라는 이름의 서점이 나온다. 유명 여배우 안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이 여행 전문 서점의 주인 윌리엄 태커(휴 그랜트)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평범한 일상이 그리운 스타 배우와 소심한 서점 주인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해피엔딩 영화다.
<노팅힐 스틸컷>
<노팅힐 스틸컷>
몇 년 전 런던에 갔을 때 영화를 촬영했던 서점을 보겠다고 'The Travel Book Co' 를 찾아 헤매다 실패하고 노팅힐 티셔츠가 걸린 옷가게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왔었다.
여행 중에 둘러본 소도시다케오의 다케오시립도서관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책의 물결 속에 부드럽게 유영하는 느낌이 따뜻했고 도서관 가까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곳의 느낌은 내게 또 다른 영감을 주기도 할 것이다. 다른 세계를 탐험하러 떠난 항해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했고, 멋지게 지은 도서관은 다른 나라에 도서관을 세우게 만들었다. 작은 서점에서 로맨스 영화가 태어나기도 했고,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과 책을 넘기며 몰입하는 시간이 쌓여 대단한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다.
우주 만물은, 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이어져있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면 더없이 겸손해진다. 어떤 시간도 하찮거나, 어떤 인연도 소중하지 않은 건 없다는 생각이다.
쉿, 지금 세상의 작은 먼지 조각 하나도 위대한 무엇이 되느라 열심히 날아다니는 중일 수 있다. 당신과 나의 일상도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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