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시집 <사슴>은 한여름에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시(詩)를 읽다 보면 무더위는 저만치 물러서고 어느새 눈 덮인 자작나무 숲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눈보라 휘날리는 만주 벌판과 백석이 화롯불에 손을 쬐며 술 한 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마가리’나 ‘고조곤히’ 같은 이북 사투리를 사전을 찾아가며 읽는 즐거움도 맛나다.
양복을 입고 여고에서 영어 수업을 하는 백석의 젊고 패기있는 모습의 사진과 당원복을 입은 노년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노년의 사진에서 백석은 북쪽의 사상을 강요당하고 사랑하는 이를 못 보는 시간만큼 눈빛이 깊었다. 앙다문 입가에 주름이 안쓰러웠다. 한겨울의 얼음장같던 사랑이 운명에 순응하는 듯한 표정을 보는 일이 나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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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불행을 택한 남자, 백석을 그리워하던 요정 주인이 있었다. 본명 김영한, 기명은 진향, 백석이 지어준 애칭 자야, 법정스님이 지어준 법명 길상화. 여러 개의 이름만큼이나 수많은 번뇌와 복잡한 인생사가 그려지는 여인이다. 그녀는 백석을 일생 동안 흠모했고 백석도 그녀를 위해 지은 시가 여러 편이라니 그들은 서로 사랑했던 게 분명하다. 백석은 김영한과 3여 년간 동거하기도 했으나 기생과의 동거를 반대하는 부모가 다른 여자와 강제 결혼을 시켰다. 그는 사랑을 위해 만주로 도피했고 다시 돌아가려 했을 때는 38선이 가로막아 김영한과 만날 수 없었다.
그 당시 백석의 심정을 노래한 시(詩)가 1937년에 발표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연인을 만나지 못하는 삶이지만 이는 자신이 택한 사랑의 길임을 시를 통해 노래했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중략-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장마가 잠깐 쉬어가는 뙤약볕 속에 성북동 길상사를 다녀왔다. 분단이 만들어 낸 백석과 김영한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1970~80년대에 최고급 요청이었던 대원각의 주인 고(故) 김영한. 그녀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0년을 조른 끝에 대원각을 기증했고, 1997년에 불교 도량 ‘길상사’가 탄생했다. 법정스님은 김영한에게 길하고 상서로운 빛을 발하라는 뜻의 이름 길상화를 지어주었다.
북녘의 백석이 그리울 때마다 김영한은 줄담배를 피웠고 결국 폐암으로 사망했다. 지독한 그리움과 못 이룬 사랑이 몸을 상하게 한 경우다. 눈이 푹푹 내리는 날 자신의 유해를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대로 길상사 언덕배기에 그녀의 유해가 뿌려졌다. 길상사는 백석을 그리워하며 눈이 오는 마당을 서성이던 김영한의 하얀 밤이 켜켜이 스민 곳이다. 길상사 안에 세운 길상화 공덕비 옆에 적힌 백석의 시를 읽으며 여름 한낮에 눈이 내리는 겨울밤으로 들어간다. 사랑했던 이의 시가 곁을 지키는 자리에 그녀는 잠들어 있다.
사랑을 간직하는 데는 시 쓰는 일밖에 없다고 재산 일부를 투척해 ‘백석 문학상’을 제정했던 여인. 기도의 도량 길상사가 탄생하게 한 여인. 못 이룬 사랑의 한풀이가 시 쓰는 이를 응원하고 연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니, 그녀의 사랑법은 보통의 연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김영한은 요정의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소원하였다.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처럼 웃음과 재주를 팔아 번 돈을 맑고 향기로운 일에 아낌없이 쓴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프라이빗 풀빌라처럼 작은 별채가 7천여 평의 도량 이곳 저곳에 자리 잡고 있다. 숲 속에 서로 떨어진 건물 배치가 예전의 은밀하고 사적이던 요정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 아래로 흐르는 작은 개울의 물소리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웃음을 나르던 기생의 치맛자락 쓸리는 소리를 닮았다.
극락전을 지나 스님들의 참선 공간과 침묵의 방을 기웃거렸다. 나무 창살에 창호지 바른 조그만 창문과 선(禪)이라 적힌 세로형 액자가 걸려 있고 한 쪽에 방석만 놓인 단출한 방이다. 정좌하고 앉아 묵직한 명상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방에 들어 침묵의 무게를 느껴본다. 때로는 말보다 강한 침묵.
만남보다 진한 그리움을 새겨본다. 길상사 극락전이 된 연회장 툇마루에 앉아 담배를 물고 비 오는 하늘을 속절없이 바라보는 그녀를 상상한다. 손에 쥐는 것보다 한발 물러서서 그윽하게 바라보는 것도 사랑의 한 방법이라고 말해준다. 만날 수도 없고 보상을 바라지도 않는 사랑. 이루지 못한 사랑도 결국에는 사랑이었음을 백석과 길상화의 이야기로 새긴다.
그리워서 뒤채는 마음이 도량을 둘러싼 담장 안에 고여있던 것일까. 경내를 걷는 동안 잡아두고 싶었던 인연, 서툴렀던 사랑이 떠오른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닿지 않는 마음은 뻗어보지도 않고 접었었다. 쉽지 않은 길이면 쉽사리 돌아섰다.
서툴고 얕아서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마음과 글이었다. 누구를 지독하게 사랑하거나 치열하게 글을 써본 적 없으면서 이루지 못한 탓은 남에게 돌렸다. 어긋난 시간과 상황을 원망하느라 사랑이든 글쓰기든 정작 제대로 스미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오늘은 그 화살이 내게 돌아와 마음을 찌른다. 딱지처럼 뜯어내도 새살처럼 다시 돋는 건 아직 글에 대한 불씨 같은 열망은 남아있는 탓일까.
백석을 그리워하며 일생을 보낸 길상화처럼 무구한 사랑을 글쓰기에 쏟아보자 생각했다. 글에 대한 갈증과 써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날마다 해내야 하는 일상과 못 이룬 일들의 기억이 뒤섞이곤 했다. 복잡한 감정들이 내 안에서 다투지 않도록 평온을 찾자고 다짐했다. 도량의 문밖을 나서니 길상화의 미소처럼 고운 능소화가 담장 위에서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