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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Aug 26. 2024

조금 다른 도시여행. 열린문화공간 후소

그 남자의 집에 초대받다.


십 대 후반에 동양화가 가진 선과 여백의 매력에 빠져 <오주석의 한국의 미(한자) 특강>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단원 김홍도>를 몰입하며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모두 후소(後素) 오주석(1956-2006)이다.


오주석의 책을 읽기 전까지, 국사 수업 시간에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의 이름을 듣거나 미술책에서 잠깐 본 게 다였다. 동양화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구도와 여백의 미, 그림 속에 들어앉은 인물의 표정을 살피며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 건 오롯이 오주석의 책을 읽은 후의 변화였다.

어느덧 안견의 몽유도원도, 윤두서의 자화상,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오주석은 수원 출신의 미술 사학자로 조선 회화와 김홍도에 대한 심층 연구로 회화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이다. 그의 서재가 수원에 있었다니, 옛사랑을 만나러 가는 설렘으로 그의 집이 된 열린 문화공간 후소(後素)로 달려다.



행궁 광장 옆으로 작은 공방이나 아기자기한 상점이 모여있는 골목이 있다. 걷다 보면 앞마당에 잘 다듬은 잔디밭과 푸른 소나무가 단아하게 배치된 2층 양옥 건물이 나온다. 가정집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1층 마루에 들어섰다. 예전에 거실이던 전시 공간에서 <자비대령화원 장한종, 이인문과 김득신> 테마전시가 열리고 있다.


‘자비대령화원’이란 도화서에서 선발되어 왕실과 관련된 서사 및 도화 활동을 담당하는 궁중 화원을 말한다. 이들이 섬세하게 그렸던 금계도나 산수화를 ‘그 남자의 집 후소'에서 보게 되니, 그가 나를 이끌고 집안에 걸린 그림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것 같았다.



자비대령화원 중 어진 제작 등으로 공로를 인정받으면 지방관 등 관직에 임명되어 신분과 지위 상승을 이루었다는 설명이 있다. 예술을 시하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부여했던 옛 제도가 현재에도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화원인 장한종을 목장 업무를 담당하는 종 6품 관직인 감목관으로 임명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어서 슬프지 않았을까

잠깐 상상해 보았다. 



뒷발을 살짝 들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나무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오주석 선생 서재’라고 나무 명판이 새겨진 서재가 마련되어 있다. 그 외에도 미술사 자료실과 방문객을 위한 쉼터가 작은방이었을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손때가 묻은 책장과 책들, 활동 사진들을 보았다. 옛 그림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얼마나 깊이 빠져들어 연구하고 고민하며 그림을 살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덕에 조선의 그림은 물론 사찰들의 건축 양식에까지 관심을 넓히게 되었으니, 그 남자는 내게 훌륭한 그림 선생님이었다. 가끔 그의 저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펼쳐 그림 속 이야기를 듣는 것도 더없는 기쁨이다.

 잠시 서재에 난 창을 통해 앞마당의 풍경을 내려보며 그리움에 잠긴다. 그나마 그가 그립거나 옛 그림이 보고 싶으면 시민에게 열려있는 이 공간에 언제든지 올 수 있음에 위로받는다. 나의 눈길을 따라 가을 햇살이 따스한 손길로 후소의 잔디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 글은 수원시 수원문화재단의 <조금 다른 도시여행 > 책자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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