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자주 이층 난간을 붙들고 소리친 기억이 있다. 난 오빠랑 결혼할거야. 크면 난 정훈 오빠랑 결혼할거야. 그녀의 아빠는 곁에서, 그의 부모님은 마당에서 구경하듯 그녈 쳐다보고 있다. 7살 무렵의 그녀는 한 살 많은 정훈의 뭐에 꽂힌건지 아랫집 그가 마당에 나오면 목청 높여 그렇게 외치곤 했다.
이웃집 사람들도 자주 목격하는 일이었다. 저 녀석 또 그러는 군. 까만 수염이 텁수룩한 앞집 아저씨는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물었다. 아저씨는 어때? 아저씨도 결혼 안 했는데 아저씨랑 결혼하지 않을래? 생각만 해도 징그러웠다. 세상에서 가장 결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 아니요. 아저씨랑은 결혼 안 할 거예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어른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아빠는 부인이 감기라도 걸려 앓아누우면 바깥에서 불에 약탕기를 올려놓고 종이로 바람을 부치고 땀을 훔쳐가며 정성스레 약을 다렸다. 밤새 머리맡에서 물수건을 갈아가며 간호를 했다.
동네가 시끄럽다. 그녀의 엄마가 피가 흐르는 머리를 하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대문을 나선다. 그녀의 아빠는 씩씩대고 할머니는 내가 동네 부끄러워 못 산다를 외쳐댄다.
가끔 그런식으로 대문밖으로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여자들이 이송되어지는 광경을 동네에서는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광경, 세상이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였고 그녀는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처음봐? 처음 봐?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지독한 사랑이었지. 나중에 그녀의 엄만 말했다. 너희 아빠는 그렇게 지독하게 나를 사랑했어. 아니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간호는 하면서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패는 건 또 뭐냐.
어느 정도 나이가 먹고부턴 그녀는 정훈에게 아무 소리도 외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잠재의식엔 일정 부분 그녀가 있을지 몰랐다. 그는 부끄러워했다. 자신이 그 소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그녀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래 윗집에 십 년이 넘게 살면서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음에도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그녀에게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엄지 닮았다고 말해준 건 그였다. 그녀가 그 얘길 다른 사람들에게 하면 그들은 코웃음쳤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안보인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아빠는 부인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혹은 집에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으면 의심하고 심문했다. 어떤 놈을 만났냐며 심하게 굴었다. 아니 그럴 것까지 있어요? 그녀가 좀만 더 컸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게 그렇게 그렇게 어렵냐고요. 그러나 그녀는 어렸고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어느날 그녀의 엄마가 집을 나갔다. 젊은 놈과 바람이 났다고 동네에 소문이 퍼졌다.
그녀는 이제 중학생이다. 친구들은 정훈이 그녈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럴리가 없다고 그녀는 대꾸했다. 이후로 그를 보면 신기루처럼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언제나 아랫집을 먼저 마주친다. 그의 집에서는 한번도 큰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간 적이 없다.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너무 조용하다. 그녀는 가끔 꿈에서 따뜻한 주황색 불이 켜진 그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그녀 자신을 본다. 그러나 거실 유리문은 굳게 닫혀있고 그 안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 집 안쪽 주방에서 도란도란 식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들킬세라 서둘러 계단을 오른다.
집이 빈 어느 날, 그녀는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췄다. 누군가 현관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얼른 손짓을 한 후 음악을 작게 줄이고 문을 열었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서 있다. 무슨 일이 있니? 너무 시끄러워서. 혼자 있어? 아주머니가 집안을 두리번거린다. 그녀는 언젠가의 생일에 아주머니로부터 작은 생일 케이크를 받은 일을 떠올린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 그냥 음악 좀 듣고 싶어서요. 혼자 있어요. 떳떳하지 못한 생물들은 이미 담을 넘어 옆집 마당에서 숨죽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