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의 풍경,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 느긋한 스페인
온종일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낸 뒤,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서 문을 나섰다. 스페인의 하늘은 여전히 밝았고, 대지에는 따스한 태양빛이 가득했다. 건조하고 따스한 햇빛을 받으니 숙소로 들어가기 아쉬워졌다. 프라도 미술관을 둘러싼 언덕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아마 미술관의 전시를 즐긴 후, 햇빛을 쬐며 작품의 여운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언덕의 잔디는 촉촉하고 부드러워 보였고, 나는 살며시 한적한 자리를 골라 앉은 뒤 답답하게 발을 누르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놓았다. 흰 양말과 초록 잔디가 선명히 대비되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달리는 강아지와, 검은 개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주인을 보았다. 비록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이 평화롭고 즐거워 보여, 나 역시 덩달아 즐거워지고 친밀한 기분이 좋았다. 스페인의 공기가 나를 품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앉아서 미술관에서 봤던 작품들을 떠올리다가, 이제 충분히 쉬었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조금만 걸으면 커다란 공원이 나온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볼 참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진한 파란색이라 아직 한낯인 것같은 착각을 주지만, 해는 서서히 기울며 대지에 노란빛을 드리웠다. 그래도 스페인의 밤이 오려면 족히 9시는 되어야 할 것이다. 스페인의 장점은 낮이 길다는 것이다. 밤이 천천히 찾아오니, 사람들은 조금 더 여유롭고 느슨해졌다.
레티로 공원은 내 예상보다 거대한 공원이었다. 공원의 곳곳을 구경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오전과 오후의 미술관 투어로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볼 수 있는 것까지만 보고 돌아가자, 생각했다. 공원 곳곳에는 걷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보였다. 산책로는 잘 되어 있었고 나무들은 키가 하나같이 컸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잠시 머리를 식히기에 좋은 공원, 거대하고 한적해서 책 한 권을 가져가 경치 좋은 곳에서 책을 읽기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수와 연못, 검은 털을 가진 붉은 부리의 거위들과 유리 궁전을 보았다.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면 이 공원의 규모에 놀랄 법하다. 세상은 참 넓다. 내가 사는 한국, 특히 서울은 참 좁다. 사람들이 작은 지역에 모여 살기 때문에, 집값은 오르고 내 터전을 만들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 다들 무리하며 애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화가 나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던 발길을 돌렸다. 그 길에 마주치는 여러 강아지와 눈인사를 했다. 또 다른 밤을 보내기 위한 두 번째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