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은 부슈 소리를 내며, 자기 머리에 총 쏘는 시늉을 했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숙소는 8명이 한 방을 같이 쓰는 게스트하우스였지만, 함께 잠을 자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어서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숙소를 나오니 해가 환하게 바깥을 비추고 있었다. 회색 돌바닥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바짝 마른 노란 먼지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꽃집을 지나니 강렬한 스페인의 햇빛에 잘 자라는 식물들이 눈에 띄었다. 과일 가게에서는 주황으로 잘 익어 먹음직스러운 오렌지를 봤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서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나도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고 싶어서 눈으로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길을 걷는 내 앞에는 브라탑과 레깅스를 입은 두 명의 백인 여자가 조깅을 하고 있었다. 하나로 질끈 묶은 황금색 말총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멀리 사라지는 레트로눔같은 머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계속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 발견한 커피숍, 아까의 그 운동하는 여자들을 다시 만났다. 물론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들을 보며 왠지 이 카페의 커피는 맛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 여성들이 마지막 일과로 커피를 마신다면, 그 커피는 미라클 모닝의 마무리를 하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로 맛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숍에 들어서자 나이가 있어 보이는 백인 아저씨가 주문을 받았다. 스페인어를 전혀 할 수 없고, 스페인 동전의 개념도 잘 모르는 내가 주문을 하려니 당혹스러웠다. 영어로 주문을 했지만, 주문을 받는 분은 약간 짜증이 난 듯했다. 내 발음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기가 죽은 듯한 태도와 작은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나의 착각이었을 수 있다. 아침은 추웠고, 이국의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은 익숙한 일이 아니었으니 내가 평소보다 예민했을지 모르지. 다행히 음료는 옆에 있던 갈색 피부의 멋진 패션을 한 남자가 만들어주었고, 그렇게 처음 먹어본 코르타도는 매우 맛있어서 이후에도 종종 도전하게 되었다. 물론 코르타도의 맛은 가게마다 달랐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커피맛에 진심이라는 나의 예상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첫 시도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 참고로 코르타도는 에스프레소에 스팀한 우유 거품을 살짝 올린 것이다. 에스프레소를 보다 부드러운 맛으로 즐길 수 있다. 잘 만든 코르타도는 무척 고소하다.
따뜻한 코르타도에 의지하며 추운 거리를 조금 더 거닐다 아침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음식점이 있을까, 길을 돌아다녀 보다가 어떤 입간판을 발견했는데, 거기엔 빵 위에 올라간 맛깔스러운 연어 사진과 함께 프로모션 할인 가격이 적혀 있었다. 합리적인 가격이라 생각이 들어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에는 무척 매력적이고 활달한, 뻗친 단발머리를 한 여자분이 주문을 받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분 역시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 번 커피를 잘 시켰으니 바게트를 시키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나는 오렌지주스와 연어, 치즈, 올리브 오일을 올린 바게트를 주문했다. 지폐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은 뒤, 자리에 돌아와 메뉴를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영수증을 살펴보는데, 영수증 하단에 적힌 금액이 가게 앞에서 봤던 입간판 프로모션 할인가와 다른 것이었다. 한화로 약 3천 원가량인 2유로를 더 내게 되었다. 카운터로 가서 직원에게 말을 했지만, 직원은 알아듣지 못했고, 새로 불러온 직원 역시 영어를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라 소통이 마무리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중간에 직원 한 명이 총을 자기 머리에 가져다 대고 푸시, 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가 날아가는 시늉을 했고, 내가 그 농담에 너무도 크게 웃어버린 덕분에, 한참 당황하고 있던 네댓 명의 직원들도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내가 시킨 메뉴는 프리미엄 메뉴였기 때문에 프로모션이 적용되지 않았고, 그래도 2유로는 돌려주겠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 동전을 돌려주었다. 웃긴 것은 이때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내가 2유로를 받고 다시 직원에게 건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직원이 팁인가요? 하고 물었고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을 해서 결국은 프로모션 없는 정가에 음식을 먹은 셈이 되었다. 그래도 여지까지 먹어본 연어 바게트 중 가장 맛있었고, 만약 스페인 마드리드 거리에서 이 음식점을 다시 보게 된다면 한 번 더 들어가서 맛을 음미하고 싶은 의사가 충분히 있다. 문을 나서는 나에게 직원들은 환히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해 주었다. 직원의 농담과 나의 팁 덕분에 이 총기(?) 사건은 하나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음식을 시키는 간단한 일조차 헤매게 되는 것이 해외여행의 묘미인 것 같다. 덕분에 즐거운 웃음을 말 하나 통하지 않는 사람과 나눌 수 있었으니 어떻게 생각하면 즐거운 경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내가 스페인어에 유창했다면, 굳이 긴 대화를 나누거나 상대방의 표정을 세심하게 읽어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서툰 언어가 상대방과 더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 같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마드리드에 있는 소피아 미술관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