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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Nov 29. 2021

너와 나의 지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거야

후원의 힘

내가 처음으로 후원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맹학교에 다니는 아이였다. 시각장애가 있는 초딩 꼬맹이와의 만남은 중학교 때 봉사활동으로 시작되었다. 내 역할은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고, 과학 실험을 진행하며 자세히 설명해주는 학습 도우미였다. 사실 졸업 조건인 봉사시간 채우기에 급급해 한 활동이었다.


처음 만날 날 아이는 인사도 받아주지 않은 채로 뚱하게 앉아 있었다. 어깨가 축 처지고 고개를 푹 숙인 모양새가 어쩐지 위축되어 보였다. 담당 선생님은 겉모습만 보고 아이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고 며칠 오다가 마는 봉사자들 때문에 쉽게 정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 눈앞에 흐릿하게 비친 나 역시 며칠 오다 말 봉사자들 중 하나였으리라.


아이와 책장을 넘긴 지 1년쯤 지나고부터는 같이 웃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조금 늦는 날엔 한참 기다렸다며 발을 동동 굴리는 애교스러운 표현도 했다. 나중에는 공부에 재미를 붙였는지 학습 의욕도 불타올랐다. 수학 문제를 소리 내 불러주면 재빠르게 암산해서 정답을 맞히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아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던 게 기억이 난다. 하굣길 엄마에게 뛰어가며 “오늘 누나랑 너무 재미있었다!”라고 천진난만하게 자랑할 정도로 밝아졌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많이 밝아졌음을 귀띔해주었다. 자신을 차별 없이 바라봐주고 같이 놀아주는 장애가 없는 누나가 생긴 것만으로도 벅차게 행복해한다고.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마음이 울렁거리던지.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 나에게 큰 기쁨이 되어주었고, 나는 처음으로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봉사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했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가진 넉넉한 시간과 감성만큼은 인색하게 굴지 않고 마음껏 써서 함께 기쁜 시간을 살아내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마음으로 아이와는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제법 오랫동안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연을 이어갔다. 아이의 흐릿한 세상이 별것 아닌 나의 자원으로 조금이나마 선명해질 수만 있다면 내 세상도 그만큼 선명해질 것 같았다.




매일 같이 들락거리는 웹사이트가 있다. ‘텀블벅’이다. 반짝거리는 배너들처럼 이곳에 모여든 창작자들의 창작욕은 언제나 반짝거린다. 비록 나는 방구석에서 창작 활동 대신 후원 활동에 심취해있지만. 속에서만 꿈틀대는 창작욕을 엄지손가락 클릭만으로 소화시킬 수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해하며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를 쭈욱 둘러본다. 오! 이번 주에는 ‘두근두근 익명 우편 프로젝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주일에 한 번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모르는 누군가의 편지 한 통을 받받을 수 있단다. 생각만으로 설렌다. 타인과 안전하게(?) 편지를 주고받는 익명 서비스,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는 꼭 실현되어야 하니 당장 후원 버튼 클릭이다. 이번 주에는 키라라의 4집 앨범 제작 펀딩도 시작되었다. 한국 전자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그녀의 음악을 오래도록 듣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상도 수상한 재능 있는 음악가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창작 활동에 제동이 걸리는 건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이니 냅다 후원 버튼 클릭.


나는 텀블벅을 통해 창작자들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언젠가 내 아이디어도 안목이 훌륭하신 후원자들을 만나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진 약간의 자원으로 보잘것없는 후원을 하며 산다. 바꿔 말하면 바쁜 일과  시간을 쪼개어,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을 쪼개어,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와중에 에너지를 쪼개어 좋아하는  무언가를 밀어주며 산다. 그들보다 조금  가진 것이 있다면 인색하게 굴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기꺼이 보태고 싶다. 사실은 그렇게 하는 편이 내가 행복하므로 후원은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 조금  나아진 세상에서  또한  행복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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