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대중교통을
아이가 3살 때부터 함께 대중교통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아이의 예민한 기질을 감화시켜볼 요량이었다. 대중교통은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한 정거장 소아과부터 시작해 네 정거장 키즈카페, 다섯 정거장 마트, 1시간 거리 박물관⋯ 갈 곳이 점점 늘어난다.
어린이집 하원 후, 마트로 가는 버스 안에선 어르신들이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몇 살이니?” “아이구 고녀석 참 똘똘하게 생겼구나” 말을 건네며 다정하게 대해준다. 가끔은 아껴두었던 마이쮸나 곰돌이 젤리를 선뜻 내어주시기도 한다. 어떤 날은 자리를 양보 받는다. 버스 안에서 낯선 사람들의 다정한 호의를 온몸으로 느낀다.
낯선 사람들의 관심을 오지랖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그 관심을 쌍수 들고 반기는 중이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주가 생각나서인지 더 애틋하게 대해주시면 아이도 더 좋아하는 것이 느껴져서 나까지 신난다. 내 바짓단을 잡고 뒤로 숨던 아이는 1년쯤 지나자 넉살이 좋아졌다. 치명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안녕하세요” “고맙쯤니다” 말도 먼저 건넬 만큼 말이다. 예민하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하는 방어적인 행동도 많이 줄어들었다.
“207호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연히 도와줄 것 같아요.”
“거봐요. 남들도 마찬가지예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쓰러진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 당장 구출 작전을 펼칠 나였다. 하지만 반대 입장이 된다면? 자신 없었다. 창피하고 무서웠다. 언제나 남에게 반듯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그런 내게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선 평가의 잣대를 대지 않고 우선 도와준다, 인간은 생각보다 괜찮은 동물이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까지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지난해 여름,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당시 나는 출산, 육아, 퇴사 이후 홀로서기를 시도하며 긴장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본격적인 공황 증상은 중요한 업무 스케줄과 시아버지 생신이 겹친 날 도로 위에서 시작되었다. 식은땀이 나고 점점 호흡이 가빠지면서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 왔다. 내가 왜 이러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왼쪽 손이 움직이지 않더니 곧장 팔, 어깨까지 마비되었다.
그 후 비행기, 지하철, 버스 안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불안한 감각. 교통편을 이용할 때마다 언제 도착하나,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도착할 때까지 가슴 졸이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요즘은 조금 편안해졌는지 이동하는 중에 예능을 즐겨본다. 며칠 전에는 <지구 오락실>의 엄마 흉내를 내는 이은지의 연기를 보며 빵빵 터지다가 아차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났다. 그 불안하고 비현실적인 감각에 조금씩 무뎌져 간다. 세상이 온통 의심스럽고 위험하기보다는 대체로 안전하다는 걸 아이와 함께 조금이나마 맛보았기 때문일까. 위험한 사건사고나 자극적인 미디어가 아닌 낯선이들에게서 받는 기분 좋은 감각으로 세상을 배운다. 이 과정이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꽤 괜찮은 정서적 자산이 되겠지.
우리는 대체로 안전하다. 주문처럼 읖조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