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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사귀기로 했습니다.

연애 이야기 좋아하세요? 그럼, 저희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세요!

by Mina

자연과 사귀기로 했습니다. 저희 오늘부터 1일째예요. 데헷!

사실은 그전부터 그를 눈여겨보긴 했습니다. 언제나 제 눈길을 끌었죠. 하지만, 적극적으로 대시한 적은 없어요. 이제, 제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다가가 보려고요.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너는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아이 C!!! 이게 다 전 남자 친구 때문이에요. 자꾸 제게 이런 질문을 해서, 사실은 너무 짜증이 나서 헤어졌어요. 그 사람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주1)예요

그런데, 저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어요.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뭐 한가롭게 이런 질문이나 할 시간이 있겠어요? 그런 질문과 고민은 다, 등 따시고 배부른 사람들의 놀이죠.


그와 헤어지고 나서, 이번 봄에 모종과 씨앗을 사서 텃밭 구탱이를 일구었어요.

모종과 씨앗을 잔뜩 사서 플라스틱 화분을 일단 죄다 빼내고 심으려는데, 농사를 지어봤어야죠,

무식하게도 화분에 붙은 팻말까지 몽땅 빼버렸으니, 모종만 보고는 그놈이 그놈 같이 생겨 당최 구분이 되지 않더라고요.

'에라 모르겠다. 나중이 되면 알겠지!' 하고 잡히는 대로 대충 여기저기 심었어요.

그래서 제집 텃밭에는 토마토 옆에 가지가, 가지 옆에 고추가, 고추옆에 오이가,

오이 옆에 호박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호박과 오이는 어찌나 투기욕이 뛰어나던지, 옆집, 앞집, 뒷집 땅을 무단침입, 불법점령을 하더니, 알박이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급히 퇴거명령을 내리고 근교로 이주를 시켜야만 했지만요.


그런데, 어느 날, 텃밭에서 '굵어진 고추가 없나?' 살피는데, 문들 이런 생각이 쳐들어왔습니다.


정말 당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비슷하게 생긴 모종과 씨앗들이

결국은 지가 돼야 할 것이 되었잖아요!

얘네들은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는지를 아는 애들이었어요!!!!!

얘네들의 창조자? 아니, 일구는 자? 포식자?

어쨌건 얘네보다 '우월한 자'라고 여긴 저!

저 자신은????

모르잖아요. 뭐가 돼야하는지,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왔는지

당최 모르고, 당최 알려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순간, 저는 그 고추를 따 먹을 수가 없었어요.

자신의 목적을 알고, 비록 자신의 터가 무단침입을 일삼는 오이 옆자리라서 오이 줄기의 횡포에 고스란히 설 자리를 내주고, 온 몸을 휘감기는 모욕을 당하고도, 기어코!!!! 고추열매를 맺었잖아요!

그래서, 그 이파리는 고춧잎 나물이 되고,

열매는 된장찌개에 작렬히 몸을 던져,

기어코!!! 알싸한 맛을 내주고 갔잖아요!!!

지 목적을 이루고 고고히 사라진 고추를 따려던 제 손모가지가 딱 멈춰졌어요.


나는 모른다.

고추는 안다!

나는 모른다.

오이는 안다!


나는 납작 엎드려서 고추로부터, 오이로부터,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했어요.

나의 목적이 무엇인지 겸허히 묻고, 겸허히 배우리라.


갑자기 경건해졌죠? 맞아요. 제가 좀 널뛰는 성격이긴 해요. 그런데, 이것은 진심이었어요.

사실 제가 원래 이렇게 진지하게 누구를 배우려고 사귀는 성격은 아닌 것 아시잖아요?

저희의 인연을 맺어준 선배의 적극 추천이 없었다면, 이 연애는 성사될 수 없었어요.


Ralph Waldo Emerson!!!! (랄프 왈도 에머슨, 주2)


이 자리를 빌려, 저희 연애성사에 힘써준 이 시대 최고의 중매쟁이, 진정한 매개자,

에머슨 선배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네요.

선배는 제게 그를 이렇게 소개해주었어요.


"흠.... 글쎼, 어떻게 이 위대한 이를 소개해야 할까?

그(자연)는 변함이 없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거야.

네가 어떠한 치욕도, 어떠한 재난을 당해도, 그가 너를 치료해 줄 거야.

그 앞에서 너의 너절한 자부심 따위는 사라질 거야.

또, 그의 신비함은 네가 아무리 캐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같이 캐기 좋아하고, 싫증도 빨리 내는 성격에는 그가 딱이야.

외모? 말해서 뭐 해. 그의 아름다움을 넋 놓고 보느라고 너는 정신이 나갈지도 몰라.

걱정 마. 나간 정신은 그가 꼭 붙잡고 다시 네게로 데리고 올 거야.

너의 존재 목적이 알고 싶다고 했지?

어찌 보면 그는 너의 존재 목적을 알려 주려고 이 세상에 왔는지도 몰라.

너무 잘해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바라봐줘. 오래도록. 수시로. 진득하게.

그는 말수가 별로 없어. 너 말 많은 남자한테 질렸다고 했지?

그러니까 완전 딱이야. 그냥 오래 애정을 갖고 바라봐주면,

그가 말해줄 거야. 네가 묻는 모든 질문에... 친절히 답해줄 거야....(주3)"


뭐, 제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이를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그래서, 그냥... 뭐.... 속는 셈 치고.... 아니, 아니.... 잘못 말했어요.

진심을 다해서 잘해보려고요.

그래서, 꼭, 그 콧대 높은 전 남친이 냅다 질문만 하고, 한 번도 알려주지 않은 그 답을 찾아서

당당히 다시 만나 알려주겠어요.


그러니... 제가 써내려가는 것은, 연애일지이기도 하고, 그를 캐는 탐정일지이기도 해요.

또, 제가 그를 알아가는 과정이지만,

한편으로는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기도 해요.

얼마나 긴 여정이 될지, 중간에 위기가 올지 모르겠지만,

이 연애일지의 끝에서, 저는 아마도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요?


"Dear 렐리, 나에게 질문해 줘서 고마워. 그 질문을 찾아서 오래 돌아왔어.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 나는.......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을."


자연과 민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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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Marcus Aurelius, 121~180 CE, 고대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의 대표자.

그의 저서 명상록은 많은 이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주2)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자기신뢰', '자연'에 대한 글로 19세기 미국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초월주의 대표자.

(주3) 에머슨의 자기신뢰(동서출판사) 중 '자연'에 대한 내용의 일부를 인용 또는 재해석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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