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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름 Jan 23. 2019

자전거 여행

나는 글쓰기와 인연이 없던 사람이다. 글쓰기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하려고 마음먹은 적도 없었다. 직업조차도 기획안이나 보고서를 쓰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글쓰기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그런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자전거 덕분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자전거 타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다. 휴일이면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나가거나 멀리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곤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땐 제법 먼 도시에서 유학 온 친구를 만나기 위해 80여 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다녀온 적도 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 고갯길도 다섯 개나 넘어야 했지만 힘들지 않았다.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자전거를 타고 멀리 여행한다는 기쁨이 더해진 탓이었을 것이다.  


내가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속도의 균형미 때문이다. 성인 남성이 낼 수 있는 자전거 속도는 보통 시속 20~30킬로미터 정도다.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걷거나 달리기에 비하면 무척 빠른 속도다. 이 ‘아름다운’ 속도가 자전거 타기만의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자동차로 달릴 때는 놓칠 수밖에 없었던 풍경을 슬로비디오를 보듯 세세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시시각각 바뀌는 바람의 촉감이라든지 갖가지 종류의 꽃향기, 그리고 바퀴를 통해 핸들로 전해지는 땅의 느낌까지 가감 없이 맛볼 수가 있다.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도 걷기나 달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 타기를 빠른 산책이라고 생각한다.


아들과 함게 이화령 정상에서


한때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자전거 타기 바람이 분 적이 있었다. 동호회가 만들어지고 주말이면 여럿이서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잘 알려진 4대 강 자전거 길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길이나 심지어는 산속 임도까지 다녔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코스를 알아보던 중 김훈 선생의 <자전거 여행>이란 책을 알게 됐다.


“눈 덮인 소백, 노령, 차령산맥들과 수많은 고개를 넘어서 풍륜은 봄의 남쪽 해안선에 당도하였다.”란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나는 금세 그의 책에 매료되고 말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란 그의 문장처럼 그의 글이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땅에 쓰러진 자가 일어서려면 반드시 쓰러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처럼, 숲은 재난의 자리를 딛고 기어이 일어선다.”란 문장에서는 알 수 없는 위안을 얻기도 했고,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란 문장을 만났을 땐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그의 글은 살을 찌르는 얼음장처럼, 때론 뼈를 녹이는 불처럼 나를 흔들어댔다.


 

<자전거 여행> 김 훈


그러다 문득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현재의 몸이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속에서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란 문장을 만났을 때였던 것 같다. 몸이 기억하는 자전거를 글로 기억할 때, 자전거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한동안 김 훈 선생의 글만 찾아 읽었다. 그의 단편소설 <화장>을 시작으로 단편소설집과 산문집, 그리고 장편소설까지 그의 글이라면 뭐든 찾아 읽었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발췌해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연필로, 혹은 워드프로세서로 베껴 썼다. <자전거 여행>은 몇 번을 읽고 베껴 썼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나의 글쓰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일기장을 만들어 내밀한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신기하거나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카메라부터 꺼내 들었던 내가 어느새 ‘저것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면 좋을까’를 먼저 궁리하게 되었다. 좋은 문구가 떠오르면 걷다가도 핸드폰을 열어 메모장에 끄적이게 된 것도, 애꿎은 나의 ‘애마’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기 시작한 것도 모두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자전거 여행을 위해 <자전거 여행>을 읽다가 그만 글쓰기 여행에 뛰어들고 만 것이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필사


요즘은 예전처럼 자전거를 타진 않지만,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꿈은 여전히 꾸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노트북 하나 챙겨 들고 핸들이 꺾이는 대로, 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하루 종일 유랑하며 살고 싶다. 그러다 밤이 되면 백지 위에 글을 풀고 문장을 키우면서 나만의 <자전거 여행>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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