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른들은 그의 아버지를 ‘빵꾸’라고 불렀다. 내가 말을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불려 온 별명이라 그 유래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자동차가 많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와 관련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총각시절 입고 다녔던 옷이나 양말의 구멍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만 해볼 뿐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별명을 붙여 ‘빵꾸네’라 불렀다. 그의 집은 당연히 ‘빵꾸네 집’이 되었고, 또래 친구들이나 동네 형들 역시 그를 ‘빵꾸’로 불렀다. 나 같으면 꽤나 싫어했을, 놀림과도 같은 그 별명을 그는 무던하게 받아들였다. ‘야, 빵꾸야’하고 누가 부르면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기보단 허연 이를 드러내며 멀겋게 웃어 보였다.
그는 좀처럼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싫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누가 자기를 놀리거나 시비를 걸어와도 왜 저러지? 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 좀처럼 대거리하지 않았다. 너무 온순한 나머지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성격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와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 마을에서 살았다. 시골 아이들이 대부분 그랬듯 그 동네에 살았던 우리 또래들 역시 아무데서나 뒹굴며 뛰노는 천둥벌거숭이들이었다. 옷은 늘 흙투성이였고 한여름 땡볕에 얼굴은 새카맣게 그을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잘 씻지도 않아 얼굴엔 땀에 전 땟자국이 덕지덕지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시골 아이답지 않게 피부가 뽀얬고 옷차림새도 늘 말쑥했다. 우리보다 체구까지 왜소한 탓에 또래들 중 몇몇은 그를 계집애라 놀리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와 단짝이었다. 부모님들도 격의 없이 지내는 터라 우리는 한 식구처럼 친하게 지냈다. 밖에서 놀다가 배가 고프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집에 가서 밥을 먹었고, 그도 우리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나와 함께 잠들곤 했다. 그때 그와 함께 우리 집 들마루에 누워서 보았던 밤하늘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금방이라도 마당 가득 쏟아질 듯 밤하늘에 빽빽하게 박혀 있던 별과 이따금씩 은하수를 가로지르며 아득하게 멀어지던 별똥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반짇고리에서 엄마 몰래 실을 끊어다가 감꽃 목걸이를 만들며 놀던 일이며 새로 꺼내 입은 옷이 새카맣게 물드는 줄도 모른 채 오디를 따먹던 일, 그리고 반딧불이를 잡으러 밤늦도록 개울가 풀숲을 돌아다니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빵꾸네’였던 그의 집에 진짜 ‘빵꾸’ 같은 일이 생긴 건 우리 집이 인근 도시로 이사를 나오고 얼마 후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부모님은 문병을 가신다면서 채비를 하고 계셨다. 그의 아버지가 시내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병이 심해 회복할 가망이 없다고 하시면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폐에 구멍이 생겨 물이 차면서 썩어 들어가는 병이라고 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도 가보았지만 시기를 놓친 탓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부모님을 따라간 병실 침대엔 그의 아버지가 아닌 웬 낯선 아저씨 한 분이 누워 있었다. 파리한 얼굴에 움푹 들어간 눈과 오목한 볼, 그리고 겨우 뼈만 남은 듯한 팔다리……. 그의 아버지는 원래 우리 아버지보다 건장한 체구였지만 그때의 모습은 마치 무덤 속 유골 같았다. 폐 속에 생겼다는 구멍으로 모든 살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아버지는 북어처럼 온몸이 마르고 쪼그라들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선 쉭쉭 거리는 소리가 났고, 몇 마디 말도 힘에 부치는지 띄엄띄엄 간신히 내뱉으셨다. 그것이 내가 본 빵꾸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의 집은 본격적으로 ‘빵꾸’가 나기 시작했다. 한 집에 살던 삼촌과 사이가 틀어져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그는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버렸다. 연로하신 할아버지와 아직 미혼인 삼촌과 함께 살아야 했던 그는 동네에서 가장 추레한 아이가 되어갔다. 귀를 덮을 만큼 덥수룩한 머리에 빨지 않은 옷은 물론이고 한참 철이 지난 옷까지 입고 다녔다. 동네 또래들은 그런 그를 ‘아버지 없는 애’, ‘엄마가 도망간 애’라 부르며 업신여기거나 놀려댔다. 하얗고 밝기만 했던 그의 얼굴에 점점 축축한 그늘이 드리우고, ‘크면 꼭 엄마를 찾아갈 거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가 중학교를 마칠 무렵 우리 집은 더 먼 도시로 이사를 했고, 그와 가끔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그것조차도 뜸해졌다.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듣는 고향 친인척 소식을 통해 가끔 그의 안부를 귀동냥하는 게 다였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고 부모님 곁을 떠나고부터는 그조차도 아예 들을 수 없었다. 사회 초년생들이 그렇듯 나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회사생활에 쫓기느라 아주 오랫동안, 아니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를 잊고 지냈다. 가끔 생각나긴 했지만 아름다운 유년시절의 그리운 친구로만 추억했을 뿐, 한 번도 안부를 궁금해하거나 소식을 수소문하지 않았다.
최근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 사람을 통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몇 년 전, 인천의 한 건물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나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엄마 사랑도 변변하게 받지 못한 그가 아닌가. 그렇게 쉽게 가서는 안 될 친구인데, 사람의 운명이란 게, 그리고 세상일이라는 게 참 모질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어릴 적 입버릇처럼 엄마는 찾았는지, 그래서 실컷 원망이라도 한 번 쏟아냈는지 궁금했지만 이젠 다 부질없는 사후약방문이 되고 말았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구멍을 메워가는 일이다. 그럼에도 결국 다 메우지 못하는 게 우리의 삶이긴 하지만, 그가 그렇게 메우고 싶어 했던 구멍, 아니 ‘빵꾸’를 결국 그런 식으로 메워버렸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허무했다.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나 볼 수 없으니 내게도 커다란 ‘빵꾸’ 하나가 새로 생긴 셈이다. 평생 안고 가야 할 후회와 자책, 이 커다란 ‘빵꾸’는 시간이 가도 더 커지기만 할 뿐 결코 메워지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