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름 Jan 24. 2019

묻는다는 것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내게서 후드득 떨어지는 것들이 있다. 하루 종일 밖에서 보고 듣고 만지며 이야기하다가 마음에 묻혀온 것들이다. 텔레비전에서 본 어느 축구선수의 노란 축구화나 단골 식당 수저통의 살짝 휘어진 젓가락이 눈에 어른 거리기도 하고, 마트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생이 밀고 가던 카트의 바퀴 소리나 우체국 창구의 대기자 순번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가 귓전에서 맴돌기도 한다. 오늘은 어느 유기견 보호소에서 보았던 흰둥이들과 누렁이들이 잔뜩 묻어왔다. 서로 컹컹대고 왈왈거리는 소리가 저녁 내내 귓속에 가득했다.


그 보호소는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60여 미터 정도의 길이에 폭이 30여 미터 정도로 식용견을 키우는 농장처럼 규모가 컸다. 안쪽엔 컨테이너 건물의 두세 배쯤 되는 크기의 비닐하우스가 두 동이나 있었고, 반 평정도의 견사 수십여 동이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직원 두 명이 분주히 오가며 견사마다 물을 채워주고 배설물을 치우고 있었다.


동네 주민은 이곳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여름이면 악취가 진동하고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밤에는 잠을 못 잔다며 언성을 높였다. 현수막도 내걸고 입구에 몰려가 시위도 했는데 요지부동이라며 독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런 우리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것인지 견사에 갇혀 있는 개들이 우리가 있는 언덕을 향해 계속해서 짖어댔다.


저녁을 먹고 뉴스를 보는데 그 유기견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곳 흰둥이들과 누렁이들은 제대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일까? 유기견이라면 분양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산속까지 누가 찾아오긴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이상한 점이 떠올라 고개를 갸웃했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견사엔 모두 누렁이들 아니면 흰둥이들뿐이었다. 그 보호소엔 검둥이들이 없는 것 같았다. 정말 검둥이들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그 보호소에 다시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최근 동물보호단체의 안락사 사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입양이 잘 되는 흰둥이들과 누렁이들만 빼고 검둥이들은 모두 안락사라도 시킨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밖에서 묻어오는 것들은 사소한 장면이나 소리, 냄새 등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불현듯 머릿속에 반짝 떠올랐다가도 금세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흰둥이들과 누렁이들처럼 금방 가라앉지 않아 계속 되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는 기차 바퀴가, 그중에서도 기관차의 바퀴가 오래도록 남았던 적이 있었다. 기관차 바퀴는 어떻게 구동되는지, 자동차처럼 변속기와 연결되어 있는지, 레일의 굴곡을 따라 기차 바퀴도 자동차 바퀴처럼 회전하는지 궁금해진 거였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인터넷을 뒤지고 유튜브 동영상을 돌려보았다.


단순한 호기심에 묻어온 ‘알아봐야 쓸데도 없고 신비하지도 않은 잡동사니’들은 대부분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금세 해결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며칠씩 마음을 성가시게 하거나 심한 경우 아프게도 한다. 주로 감정에 관한 문제들인데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나 말, 혹은 행동 등이 묻어오면서 생기는 것들이다. 명확한 이유나 대략의 맥락이라도 알 수 있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나 육감에 관한 문제들, 쉽게 말해서 ‘눈치’에 관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말이 그렇다. 액면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대화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사람 사이의 대화는 늘 그렇게 순수하지만은 않다. 상대의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야 하거나 때로는 통번역 수준으로 해석해야 할 때도 있다. 여기에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의 억양과 표정까지 말끔하지 않다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선 매우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뉘앙스의 의미와 맥락에 대해 묻고 또 묻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용목 시인은 최근 어느 글에서 ‘우리의 일상어가 이미 감춰진 상태 또는 줄여진 상태에서 발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한 영향으로 시에 쓰이는 일상어도 감추어지거나 줄여지지 않는 것 같고 했다. 일상어 자체가 이미 함축적이고 생략된 상태여서 더 줄이거나 숨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신용목 시인의 말을 ‘일상어=시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 받아들이는 건 곤란하겠지만, 우리의 맥락 없고 아리송한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분석으로써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 같다.


마음에 묻어오는 오해와 의문의 상당 부분은 일상어의 생략되고 함축된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나만 충분하게 알고 있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종종 상대도 동일한 양의 정보를 가진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서로 이심전심 알 만한 것들을 생략하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상대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모호하게 들릴 수밖에 없고 때에 따라서는 납득할 수 없다며 역정을 낼 수도 있다.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상대를 배척하거나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을 생략하거나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갈등이 생겨나는 건 여느 불통의 대화와 비슷하지만 오해가 생겨날 여지는 없다. 너무나 분명하게 악의적이고 거짓인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마음에 묻어오지도 않는다. 설령 묻어온다고 해도 금세 지워진다.


하지만 악의 없이 감춰진 것들, 생략된 것들은 점성이 높다. 한번 묻어오면 잘 지워지지 않는다. 손이나 옷에 묻은 유성물감처럼 쉽게 씻기지 않는다. 상대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건 가슴 안쪽에 묻어두고 발효를 시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려운 그림을 감상하듯, 난해한 시를 읽듯 그렇게 말이다. 묻어온 것들에 대해 묻고, 또 묻는 것, 그러다가 우리 안에 묻기도 하는 것, 그것이 파편화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숙명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빵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