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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름 Jan 29. 2019

관계

윌과 맥의 사이가 나빠진 건 순전히 나 때문이다. 처음에 그 둘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호기심 많고 성격 급한 윌이 맥을 귀찮게 했지만 맥은 윌을 마냥 내치지만은 않았다. 맥은 높은 곳에 앉아 윌과 일정한 거리를 두다가도 때로는 낮은 곳에 내려와 윌에게 곁을 주기도 했다. 흥분 잘하는 윌은 항상 천방지축이었던 반면, 한 살 많은 맥은 언제나 차분했고 때로는 냉정했다. 기분이 조금만 안 좋아도 하악질을 해대며 윌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면 윌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맥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보았다. 윌은 저돌적으로, 맥은 썸을 타 듯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맥은 아들 녀석이 키운다며 입양한 고양이다. 기관지가 좋지 않은 아내는 고양이를 기르는 걸 마뜩지 않게 생각했다. 털이 많이 날려 기관지에 안 좋다며 반대했지만 아들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실내에 들여놓고 키우는 대신 베란다나 마당에서 키우기로 하고 입양을 허락했다. 


윌은 아내와 내가 입양한 강아지다. 맥이 오고 나서 일 년 뒤 우리 집에 왔다. 낮엔 빈집이나 마찬가지인 시골집에 개 한 마리 정도는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들였다. 처음엔 씩씩한 성격의 진돗개를 생각도 했지만, 고심 끝에 사람과 친화력이 좋은 레트리버를 들이기로 했다. 털이 짧은 래브라도 종으로 검은색이다. 덩치 큰 검은색 강아지라서 언뜻 위협감을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순둥이다. 


사건은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은 화분에서 촉발되었다. 맥은 베란다 난간 위에 올라가 쉬는 걸 좋아했다. 난간은 윌이 일어서도 닿지 못할 만큼 높다랗다. 맥은 종종 그 위에 올라가 볕을 쬐거나 낮잠을 잤다. 그러면 윌은 그 아래 마당에서 배를 깔고 쉬곤 했다.


여름이 다 지난 어느 휴일이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베란다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보니 화분 하나가 마당에 떨어져 있고 화분에서 쏟아진 흙이 베란다와 마당에 흩어져 있었다. 맥이 베란다 난간의 화분이 있던 자리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았다. 맥이 난간으로 뛰어 올라가면서 화분을 건드리는 바람에 떨어진 거였다. 


“야!”


나는 베란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소리를 질렀다. 놀란 맥이 후다닥 베란다 난간 위를 뛰어 도망을 쳤다. 그 바람에 작은 화분 몇 개가 또다시 마당으로 떨어졌다. 베란다와 마당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맥을 더 크게 나무랐다. 그런데 마당에서 이를 지켜보던 윌이 갑자기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베란다를 올려다보면서 맥을 향해 사납게 짖어대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좋아서 짖는 소리가 아니었다. 개들이 상대를 위협을 하고 겁 줄 때, 혹은 공격을 할 때 짖는 소리였다. 윌이 으르렁거리며 사납게 짖어대자 맥도 위협을 느꼈는지 잽싸게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 위로 올라갔다. 맥이 겁먹은 모습을 보이자 윌은 더 흥분했다. 내가 괜찮다고, 그만 짖으라고 해도 멈추지 않았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신발을 신고 황급히 마당으로 내려가 윌을 가로막고 달랬다. 그러나 윌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담장 너머로 맥이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비로소 윌은 조용해졌다. 


그날부터 윌은 내가 보이기만 하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베란다 위 이쪽저쪽을 올려다보다가 담장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맥이 보이기라도 하면 쫓아가서 사납게 짖어댔다. 괜찮다고, 그만 하라고 아무리 타이르고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베란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윌이 맥에게 예전처럼 장난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베란다 바닥에 앉아 있는 맥을 올려다보며 마당에 있는 윌이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베란다 턱에 앞다리를 걸치고 서서는 맥의 머리를 핥아댔다. 그런 윌을 맥은 또 가만히 받아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모습에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베란다 문을 열었는데, 윌이 나를 보자마자 또 돌변하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꼬리를 살랑대던 녀석이 잡아먹을 듯이 맥을 향해 짖어댔다. 놀란 맥이 베란다 끝으로 도망가더니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윌은 그런 맥을 쫓아가며 사납게 짖어댔다. 그러니까 내가 없는 곳에선 둘의 관계가 예전처럼 평화로웠는데,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나워지는 거였다. 


윌의 머릿속에서 내가 맥을 혼내던 모습을 지우느라 한동안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베란다 문을 열거나 마당으로 나가기 전에 윌이 좋아하는 간식을 듬뿍 준비했다. 그리고 흥분한 녀석이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하면 간식을 이용해 어르고 달랬다. 윌이 간식을 먹는 사이 맥을 쓰다듬으며 예뻐하는 모습도 일부러 보여줬다. 처음엔 효과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윌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윌과 맥과 나의 관계가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는 데는 수개월이 걸렸다. 지금은 맥이 있을 때 내가 마당에 나가도 윌이 흥분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선 아주 오랜 시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사이가 가까웠던 사이일수록 더 그런 것 같다. 허물이 없다는 건 둘의 사이가 그만큼 순수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순수하고 깨끗할수록 쉽게 오염된다. 그리고 한번 오염되면 원래대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게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관계라는 건 동물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윌과 맥을 보며 '사이'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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