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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Oct 24. 2022

철수


다시 철수랑 연락을 주고받게 됐을 때 내가 신신당부한 건 하나였다. 다른 건 다 읽어도 되는데, '여자 친구 철수' 읽지 마. 그 말이 청소년에게 던져 준 '청소년 관람 불가' 같은 문구였다는 건 며칠 뒤에 알았다. 철수는 다른 글은 손도 안 대고, 그 글만 읽었다. 며칠간 그 글만 읽었고, 한 오십 번쯤 읽으면 할 말이 떠오를 것 같아서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했다.


으니까 어땠어?

뒷부분은 지금도 못 읽고, 중간까지만 읽고 또 읽어. 댓글도 다 읽었어. 다들 네  알아준 걸 보니까, 안심이 되더라. 우리가 얼마나 서로 좋아했는지 생각했어. 읽으니까 그 시절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계속 곱씹고 싶었어.


철수도 뛰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발견하자마자 나는 뛰었고, 한 팔은 어깨 위로 한 팔은 철수 팔 아래로 두른 다음 한쪽 어깨에 얼굴을 묻 순간 눈물이 터졌다. 정오의 도시 한복판에서 이렇게 펑펑 울면 부끄러운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철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다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만 우는 게 아니다.


더 울어도 된다는 신호 같아서 안은 팔을 안 풀더 울었다.


철수는 눈물이 없는 편이었다. 우는 건 언제나 내 쪽이어서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만 자제를 못하고, 평온을 잃고, 감정의 끝까지 내려간 건가 싶어서. 담담함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이럴까 싶게  태연한 철수가 길에서, 내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떨며 울다니... 아직, 서로의 얼굴을 보기도 전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어깨에서 고개를 떼고 처음 보게 될 얼굴은 붉어진 눈과 떨리는 입술일 게 분명했다.


만나기 전날 철수한테 문자가 왔다.

내일 뭐 입을 거야?

후디+ 외투+ 편한 바지+ 운동화.

거기 맞춰 입고 갈게.

넌 뭐 입을 계획이었는데?

재킷.

정장은 아니지? 정장만 아니면 나도 맞출 수 있어.

그랬더니 정장 비슷한 거였는데 바꿀 거란 대답이 돌아왔다.

재킷 입어. 나도 입을게.


그리고 만난 우리는, 재킷을 입은 나와 가죽점퍼를 입은 철수.

둘 다 상대에게 맞추려고 처음의 계획을 바꾼 거였다. 옷은, 꾸준한 열정을 가지고 우리가 탐닉한 것 중 하나였다. 계절이 바뀌면 함께 옷 정리를 했고, 쇼핑하러 가서 서로의 옷을 골라주면서 고개를 젓거나 끄덕고, 색과 디자인 같은 옷을 사서 입기도 했다. 떨어져 지낼 때, 한 명이 어떤 아이템에 대해 언급하면 다른 한쪽도 곧 걸 샀다고 보고했다. 이 옷 예쁘다- 두 번 이상 말하는 건 금기였다. 두 번 이상 말하면 그 옷을 선물 받게 되니까. 아마 부모님 다음으로 나한테 옷을 많이  주거나 만들어 사람은 철수일 것이다.  


퇴근도 산책도 밤에 해서 그런지 시월 들어 자주 추위를 느꼈다. 그래서 남쪽에서 오는 철수한테 따뜻하게 입고 오라고 했는데, 막상 우리가 만난 오후는 눈부시게 더웠다.


누가 재킷 입는다고 했어?

한 팔에 재킷을 걸고 소매를 걷으면서 나는 철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농담을 했다.

너가 서울 춥다고 했잖아,라고 철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너무 빨리 걷나? 다른 사람들은 별로 안 더워 보이는데. 라고 대답했다. 진짜 그런가 싶어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고, 한참 살피다 문득 그게 철수식 유머인 걸 깨달았다. 철수는 웃음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농담을 자주 했지만 끝에 가서는 나를 꼭 웃게 했다.


만나면 뭐 하고 싶었어?

그냥... 너랑 많이 걷고 싶었어. 그거 말 아무것도.


우리는 정말 많이 걸었다. 전처럼 엉뚱한 데서 웃고 사소한 데 감탄하면서, 가을과 우리와 눈에 보이는 예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찍었다. 걷다가 잠깐만 멈춰도, 저기 들어갈까? 저거 구경할래? 묻는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그게 좋아서 자꾸 멈추고 싶을 정도였다. 시간이,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것들로만 이루어진 게 좋았다.


으면서 그동안 만난 사람들 이야길 했더니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철수가 말했다.

나도 다 겪었던 감정이야. 아는 감정이고. 널 만나면 다 그렇게 될 걸. 너가 너무...

잠깐 단어를 고르더니 철수가 말을 이었다.


뭐든지 말하게 해.


나는... 선이 없나 봐. 여기는 넘어오지 마세요, 하는 선이 없는 사람인 거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지는 거지. 선이 없으니까 너무 어렵고. 룰도 규칙도 없으니까.

룰이랑 규칙이랑 같은 말 아?


헤어질 땐 웃었다. 곧 만날 걸 아는 사람과는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다. 개표구 뒤에 서서 손을 흔들다가 계단을 내려가는 철수 쪽으로 팔을 뻗었다. 한 걸음 걷고 한 번 돌아보고, 다시 걷고 또 돌아보던 철수가 빠르게 돌아와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하면 한 번 더 올 것 같아서.


 번 더 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질문을 듣는다면, 의미가 있다고 대답하겠다.  위해 한번 거기 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 걸 보여주는 의미. 너가 팔을 뻗으면 언제든 그쪽으로 가겠단 의미. 마지막까지 너한테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의미. 비행기 시간보다 너를 한번 더 보는 게 중요하단 의미. 긴박한 시간의 유치한 장난에도 기꺼이 응하겠단 의미.


의미들에 둘러싸여 마르고 강한 손이 차고 작은 손을 잡았다 놓았다. 손과 손이 떨어지는 순간 입술을 꼭 깨물었는데, 깨물었 걸 느끼자마자 터지는 게 있었다. 입술에는

생각보다 많은 감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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