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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Mar 21. 2023

있던 밤

<숲_ 최백규>


<등장인물>

 

 


<무대 배경>

 밤의 숲


익숙해지면 표정이 보이는 정도의 어둠.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들 사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놓인 벤치가 있다. 벤치 위에는 텀블러와 책 한 권, 가방이 놓여 있고 벤치 아래 돗자리에 두 명이 누워 있다.


   그런 말 있잖아...

   (다음 말을 기다려도 이어지는 말이 없자) 어떤 말?

   연락 안 할 때도 널 생각하고 있다는 말. 동의해?

   응, 절반은. 근데 침묵이 길어지면 동의 못 하지. 생각은 곧 연락으로 이어지잖아, 어떤 방식으로든. 연락 안 할 핑계로 그런 말 하는 사람이면 언젠가 알아 볼 수 있어. 정말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면, 우주 정거장 고치러 갔거나... 수능 문제 출제하러 간 거면 나중에라도 오해가 풀리겠지.


   (고개를 돌려 잠깐 바라보고) 잊을 수 없는 밤 있어?

    그 밤을 얘기하려면... 말한 적 없는 사람 이야길 해야 돼. 발음하는 법을 잊어버린 이름이야. 그 이름을 꺼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상상도 못 할 . 듣고 싶어?

    아니. 그렇게 힘든 걸 뭐하러 해.

    (뒤척이는 위를 보다) 궁금한 적 있어? 도시 끝에서 끝까지 걸으면 얼마나 걸릴지.

    그럼! 새로운 데 갈 때마다 차로 가는 시간, 걸어서 가는 시간 다 찾아보는데.

    걸어본 적 있어? 쓰러질 때까지.

   (몸을 일으켜 성을 보며) 그런 적 있어?

    그때 나는 걔랑 나를 떼어 놓고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느끼는 걸 똑같이 느낀다는 말, 내가 원하는 게 걔가 원하는 거란 말을 믿었거든. 래서... 밤새 걸으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어. 지금 바로 출발하잔 뜻으로 한 말이어. (사이)

영등포 시장에서 출발했어. 솥을 걸어 놓고 끓이는 호박죽을 팔던 시장이었는데... 밤에는 정말 조용했어. 낮의 활기가 천막 속에서 한껏 고요해져야 밤이 시작된 느낌이 들 정도로. (생각에 빠진 표정) 작정하고 나선 길이 아니어서, 집에서 입차림 그대로였어. 반바지에 민소매. 땀이 흘렀다 말랐다 하면 얼마나 끈적해지는지 알아? 날벌레가 모르고 팔에 앉으면 딱 들러붙을 정도야.

    (웃다가 하늘을 보고 눕는다.) 여름밤은 습하니까 벌레도 날개가 젖어서 무거웠겠다.

    처음엔 힘이 넘쳤. 집에서 챙겨 온 물을 조금씩 마시면서 갔어. 걷거나 뛸 때 갑자기  많이 마시면 출렁이는 게 느껴지잖아. 그래서 축인다는 생각으로, 적신다는 생각으로 한 모금만.

    (벤치에서 텀블러를 내려 뚜껑에 차를 따르고) 마실래?

    먼저 마셔. 난 좀 있다가.

    (번에 나눠 마시고 뚜껑을 닫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손에 든 물병이 귀찮라. 나중엔 버리고 싶은 생각만 들었어.

    버리지.

    버렸어. 홀가분해서 좋았어. 길에 차도 없고, 몸도 가볍고. 걸음 소리만 울리 시에 둘 뿐인 것 같았. 매일 붙어 지낸 데다, 방금까지 뭐 하다 나왔는지 다 아는 사이였는데도 대화가 끊지 않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신기해. 나중엔, 할 얘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떠들 힘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는데 둘 다 어디 앉아서 말은 안 했어.

    무언의 약속?

    비슷해. 앉는 순간 산책이 끝날까 봐. 밤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잖아. 아무리 날벌레를 팔에 붙이고 다니는 이상한 애들이라 해도.

    (놀라며) 그걸 계속 붙이고 다녔어? 아무도 말 못 걸게 하는 장치야 뭐야.

    벌레랑 말 거는 건 아무 상관없던데. 여튼 우리는 걸었어. 걷고 또 걷다 보... 어느새 다리도 건너고, 버스 안에서만 보던 길도 통과하고, 낯선 데서 헤매기도 하고... 그러다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는 사실 잊었어.  

    왔구나, 아침이.

    아니야, 아직은. 목이 말랐어. 생수 한 통을 나눠 마셨거든. 그래서 챙겨 왔냐고 물어봤어. 그랬더니... 너가 챙겨 올 줄 알고 그냥 나왔다는 거야.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거든. (양손을 교차해 양팔을 쓰다듬는다.)

    담요 꺼낼까?

    (끄덕인다.)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덮어 주고 자신은 그냥 눕는다.)

    (담요를 다시 펄럭여 함께 덮는다.) 한참 가발이 아파서 그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운동화를 벗었어. 양말에 피가, 축축하게... 정말 선명하게...

     그만 걸으라고 지금 말해 봤자 과거의 너는 못 듣겠지. 들었어도 멈췄을 것 같지 않고.

    맞아. 발톱이 깨져 있었는데, 흔들어 안 떨어지길래 다시 신었어. 걱정이 됐는지 걔가 어디 좀 앉자고 하더라. 그때부턴 벤치 찾느라 두리번거리면서 걷기 시작했어. 찾을 땐 왜 그렇게 없을까. 벤치랑, 물이랑, 동전 같은 건.

     여긴 벤치 많아서 좋다. 침대도 되고 탁자도 되고 의자 되는 건 벤치뿐일 거야.

     몇 개 더 있긴 한데 그 얘긴 다음에 하고...

     (다급하게) 뭔데? 벤치 말고 뭐가 또 그래?

     빈백. 공기나 스티로폼으로 채운 신한 의자 말이야. 그리고 평상. 또... 학교에서 책상 세 개를 붙여도 그렇게 쓸 수 있고.

     지금 너가 말한 거 ,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좋아하는 데도 다 알진 못했네.  

     다 알아야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니까. 뭔가가 좋아지는 건, 꼭 세탁기 탈수 기능 같아.

     탈수?

     응. 하도 탈탈거리면서 돌아가서 다 말랐나 하고 꺼내 보면 아직도 물기가 있잖아. 그 물기만큼,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 거야.

     그럼 건조기는? 건조기는 다 말랐을 때 꺼내니까 모르는 부분이 없는 거야?

     건조기는 젖어 있을 때를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옷의 모든 시간을 알 수는 없는 거야. 옷을 만든 사람도, 입 사람도, 잃어버린 사람도. (눈을 잠깐 감았다 뜨) 나도 걜 다 알진 못했을 거야. 그땐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니까 그런 밤이 있었... 돌아가 말도 안 하고 계속 걷는 밤.  

     안 돌아갔구나. 피가 나도, 발톱이 깨져도.

     뒤에서 보니까 땀에 젖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있었어. 내 등도 그랬겠지. 상대 보면서 내 모습 보는 건 거울이 없을 때일까, 거울 볼 필요가 없을 때일까. 우리는... 계속 걸었어.

     돌아갈 힘을 남겨 둘 생각 같은 건 안 했겠지?

     (끄덕이고) 그때 정말 먹고 싶었던 게 뭔지 알아?

     (묻는 눈으로 본다.)

     요구르트였어. 다섯 개 한 줄에 빨대 다섯 개를 꽂고 차례대로 먹고 싶었어. 얼마나 달고 시원할지 생각하면... (흐뭇한 표정) 그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어떤 빌딩 앞에 도착했어. 벤치였는지, 화단 턱 같은 데였는지 모르겠는데 쓰러지듯 주저앉어. 마침 바람 불기 시작했고. 그때, 어떤 사람이 우리 쪽으로 똑바로 걸어오는 거야.

    (담요 속에서 몸을 떤다.)

    그 사람이 물었. 혹시 핸드폰 있냐고.

    있다고 했어?

    망설였어. 있다고 할까, 없다고 하면 믿을까. 거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는데 폰을 놓고 와서 연락이 안 된다고 잠깐 빌려 달라는데,  말을 믿어도 될 지 감이 안 왔어.

    (담요를 박차고 일어나) 주면 안 되지. 이상한 프로그램 같은 거 깔 수도 있잖아.

    그런 생각 못했어. 표정밖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거만 보고, 거짓말 아닌  같아서 그냥...

    줬어?

    그냥 걜 쳐다봤어. 그러니까 걔가 자기 폰을 주더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걘 태연했어. 사람이 세 걸음쯤 떨어져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어. 들을 생각 없었는데 다 들렸어.

    범죄 조직 같은 건 아니지?

    (웃으며) 그 정도면 잊을 수 없는 밤이 아니라, 큰일 난 밤 아냐? 어디냐고, 빌린 전화니까 이 번호로 전화하지 말라고 하는 걸 보니 말한 대로인 것 같았어. 그 시간에 거기서 누굴, 왜 만나기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근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어.

    (일어나 앉으며) 역시 뭔가 있었구나!

    그 사람이 자기 가방에 손을 넣어  찾는 거야. 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사람 손만 보고 있었는데...

    총은 아니겠지.

    처음엔 눈을 의심했어. 지금 보고 있는 게 내가 아는 그게 맞나 싶어서.

    (어서 말하라는 눈으로)

    ... 빼빼로였어.

    (털썩 드러눕는다.)  

    괜찮다고 하니까, 돈으로 드리면 안 받을 것 같은데 빼빼로밖에 가진 게 없다고...

    받았어?

    받았어. 속으로... 물이 더 좋은데, 생각했지만 빼빼로 말고 생수는 없어요? 그럴 순 없잖아. 편의점도 아니고. 근데 그걸 받 거기 앉아 는 게 영 쑥스러운 거야. 혹시 뭘 더 줄까 봐. 그때쯤엔 이 통째로 캐러멜이 됐나 싶을 정도로 스치는 데 다 끈적끈적해서... 바람에  땀을 더 말리고 싶었지만 일어났지. 흐늘거리는 캐러멜 조각이 다시 도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어. 날이 밝아 오고... 첫차가 달리기 시작했어. 집으로 돌아가 사람도, 일터로  사람도, 다 창밖에 캐러멜걸어가는 걸 봤겠지. 머리칼은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고, 다리는 맥없이  있고, 팔은 제멋대로 흔들리 있는 광경을. 그런 상황인데 손에는 뜬금없이 빼로...... 우린 그걸 먹지도 못했어. 너무 목이 말라서.


    미안해.

   뭐가.

    우주에 간 것도 아닌데 연락 안 해서. 그때.

    괜찮아. (명랑하게) 수능 문제 내러 간 거잖아.

    (더 미안한 표정)

    매일 연락하던 사람 사라질 수 있단 걸 알게 되면, 면역 생길 줄 알았. 근데 매번 다른 상실이었어. 내가 사라 사람일 때도 있었으니까... 나도 누군가한테 미안한 사람일 거야. 모르는 사람한테 전화기 빌린 사람이 나일 수도 있고, 첫차에 앉아 있던 게 나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지금은... 우리가 같이 있다는 것만 생각할게. 오늘밤은.



안 들리던 바람 소리 들린다.

위와 성이 몸을 돌리진 않고 몸을 꼭 붙인다.

바람 소리 이어진다.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그 빼빼로가 아직 집에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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