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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사펀드 May 03. 2018

#12. 뭐 먹지?

농사펀드 뉴스레터 '에디터가쓰다'

감자, 아니 흙을 기르시는 듯한 농부님

뭐 먹지? 


홍성에서 수박 농사 지으시는 이을숙 농부님이 얼마 전 전화를 주셨습니다. 독한 가뭄에 밤새워 밭에 물 줬다고 하시며 "혹시 도움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말씀인즉슨 몇 달 전 감자, 양배추, 배추를 도매상인과 미리 밭떼기했는데, 그분이 잠적하셨다는 겁니다. 처음엔 화가 났어요. 이렇게 열심히 농사짓는 농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니! 그런데 정작 농부님은 그분을 탓하지 않는다며 얼마나 사정이 곤란했으면 그랬겠냐고 하십니다. 


"밭떼기"란 농산물을 수확하기 전, 적절한 가격에 밭 단위로 농산물을 미리 거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루라도 더 신선하게, 효율적으로 유통하는 거래방법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계약이 구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허술한 제도 탓에 법적 책임이 없는 것이지요. 유통인만 탓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중간에서 떼어먹는 사람'이라는 검은 딱지가 붙은 유통인은 사실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유통인이 없다면 우리는 사는 곳 근처 농가의 먹거리만 먹게 될 테니까요. 다양한 제철 음식을 즐기는 것은 꿈도 못 꾸겠죠.


그렇다면 구두계약과, 긴 유통 단계 등 부실한 제도를 탓해야 할까요? 농부는 1차 농산물, 신선품을 점점 먹지 않는 도시민의 식생활도 걱정입니다. "농업기술은 날이 갈수록 좋아져서 생산량은 늘어가는데, 먹는 사람은 어째 계속 줄어요." 농부님은 어떻게든 맛 좋고 안전한 채소를 많은 사람에게 먹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야만 깨끗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자립할 수 있으니까요. 


이을숙 농부님과 아이들, 든든한 뿌리지요.
엄마의 밭은 두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내 힘으로, 나아가 우리의 힘으로 먹거리를 마련하고 삶터를 꾸리는 것이 진정한 자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입 먹거리나 가공식품에 식생활을 의존하는 것은 자립에서 멀어지는 길이 아닐까요?


겁도 납니다. 밭떼기로 인한 피해는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뉴스라서 투자자들이 시큰둥하면 어쩌나. 올여름엔 아삭 달콤하고, 뽀얗게 포근한 감자의 맛, 꼭 한번 봐주세요. 그리고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농부가 밤새워 밭에 물을 줄 때의 그 마음으로요.                



2017년 6월 23일 
다음 뉴스레터에는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만 쓰겠노라 다짐하는 에디터 장시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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