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사펀드 May 20. 2019

나는 무능한 스타트업 대표다

농사펀드 2.0을 위한 고민과 변화의 과정에 대해

2015년 03월 농사펀드의 시작


“종범 씨, 나 그냥 다른 거 할까?” 평소 알고 지내던 농부가 말했다. 농부는 아무리 노력해서 농사지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 해, 그렇게 수확한 무농약 고구마는 제 값을 받지 못하거나 폐기됐다. 뉴스에서나 보던 유통문제가 나의 문제로 다가왔다. ‘이 농부의 고구마를 내년에 먹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다른 농부는 6년째 딸기 농사를 이어오던 땅에서 쫓겨났다. 땅을 살 돈이 없었다. 납품을 위해 빚을 내 받았던 유기인증은 쓸모가 없게 돼버렸다. 다른 땅을 임대받고 농사지을 준비를 해야 하는 계절이지만 은행에서 대출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거라도 마시고 가라고 내준 믹스커피가 썼다.  


기대와 두려움의 교차점이
농사펀드의 시작이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좋은 농부가 없어지면 좋은 먹거리도 없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농부가 판매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자금 마련을 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만난 농부 대부분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었다. 2013년, 크라우드펀딩 '킥스타터'에서 자금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는 힌트를 얻었다. 


개인 블로그와 SNS를 통해 “농산물펀드(농사펀드) 해볼까?”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부여에서 쌀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농사짓기 전 소액을 투자하고 가을에 투자금 대신 쌀로 돌려받는 프로젝트였다. 멧돼지와 태풍 피해에 대한 위험은 함께 지지만 풍년이 들었을 경우 혜택도 나누는 형태였다.      

2013년, 첫 펀딩의 벼베기 행사 최후의 생존자들

2013년에 시작한 프로젝트는 2014년에 보완된 형태로 진행되었고 소셜벤처대회에서 우수상 수상과 함께 임팩트 투자회사인 (유)SOPOONG에서의 투자제안을 받았다. 이 일이 사회에 필요한 일 일수도 있겠다는 기대와 그저 그런 하나의 시도로 끝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되었을 때 농사펀드라는 스타트업 창업을 결심했다.




2018년 09월 돌아보기  


서비스를 오픈한 지 4년이 지났다. 같은 시기에 창업했던 스타트업 몇 곳은 서비스를 종료했고 몇 곳은 큰 투자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스타트업이 3년을 버틴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말과 왜 아직 후속투자를 받지 못했냐는 평가를 함께 받게 되었다. 2018년에는 2015년 대비 10배로 매출이 늘었지만 순수 플랫폼 매출은 정체가 되었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의 오랜 고객이 회원 탈퇴를 했다는 이야기를 멤버에게 전해 들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포스트잇으로 이야기하기는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꽤 유용했다.

  

조직 내부의 스트레스가 높아졌다. 멤버 간 의견 출동이 많아졌고 한숨을 쉬며 마치는 회의가 늘어났다. 초기부터 함께 한 멤버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서로 너무 잘 알았다. 방식과 결과물만 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하며 갈등도 쌓였다. 갈등을 풀고 방법을 논의해야 하는 시기에 나는 자리에 없었다. 하반기에 쓸 자금을 위해, 내년 사업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공모전과 자문 요청 자리를 찾아다녔다. 


미리 준비해놓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만나는 목적은 있으나 목표가 불명확한 일들이 많다 보니 “대표님은 또 어디 가셨어?”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부는 곪고 있었지만 잘 나가는 스타트업처럼 보이기 위해 더 연기했던 것 같다.     


우리 정말 괜찮은 걸까?

“저 이제 이사직을 사임할게요.” 첫 투자자로부터 이사에서 빠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멤버 중 한 명이 퇴직을 했고 또 다른 멤버는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대안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회사에 죄책감이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나에 대한 해고 통보처럼 들렸다. 회사에서 내가 잘리는 기분이었다. 


탁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통찰력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성과를 내는 스타트업 대표. 하고자 하는 일의 동기도, 필요한 이유도 명확했기 때문에 탁월한 결과를 낼 것이라 믿었다.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에요?


멤버의 말에 가까스로 세워둔 마음의 임시 벽이 ‘툭’하고 쓰러졌다. 탁월한 대표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언론에서 만들어준 이미지를 부정하고 직감에 의존해 해결방법을 제시했던 나도 부정해야 했다. 그게 대체 뭐라고... 그때는 15년의 경력과 지난 4년 간 한 눈 팔지 않고 달려온 내 노력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참 힘들었다.




2019년 01월 변화하기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됐다. 문제 해결을 위해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일반적인 스타트업 멘토보다는 예리한 칼로 우리를 난도질하고 재조립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과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호오~’ 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장문의 메일로 그동안 우리가 고민했던 것, 사업현황과 멤버들 개개인의 상활을 모두 적고 꼭 읽고 준비해서 와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고맙게도 자신의 일처럼 준비하고 도와주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워크숍을 했다. 멤버들이 속에 있던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며 눈물의 워크숍이 되긴 했지만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지금도 이후 진행상황을 중간중간 공유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전문가와 함께 하는 농사펀드 워크숍
탈피하지 못하면 죽는 뱀처럼     


워크숍을 마치고 돌아와 사업모델을 점검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그 절차와 방법론을 내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경영자로써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멤버들에게 잘 모른다고 고백하고 공부하겠다고 했다. 책을 샀고, 전문가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심리상담도 신청했다. 


/맥킨지식 전략 시나리오, 린 분석, 비즈니스모델의 탄생, How to 문제 해결 방법/ 이 책들이 특히 도움이 되었다. 책을 빨아들인다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읽고 적용했다. 우리에게 맞는 비즈니스모델캔버스를 만들고 진행계획을 짰다. 


그 과정에서 (유)SOPOONG에 다시 연락을 했다.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다시 한번 엑셀러레이팅을 해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우리가 투자받았을 당시와 지금은 방식도 많이 바뀌었고 새롭고 참신한 스타트업 팀도 많아졌기 때문에 골방 노인네가 주책 부리는 것 같았지만 우린 그만큼 간절했다. (유)SOPOONG의 한상엽 대표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잘 생각했다고, 농사펀드는 충분히 잘 될 수 있는 팀이라는 응원과 함께. 

 

다 함께 우리를 수술대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해부하기 시작했다.


방법에 대해 상의를 하며 서로 어떤 역할을 나누어서 할지 정했다. 큰 그림을 경영진이 정하고 각 실무자가 실행방법을 고민하는 형태에서 큰 그림을 함께 그리기 위해 재료를 모으는 일부터 함께 한 것이다. 방법을 정하고 논의 후 실행하고 단계별 결과를 함께 분석하는 형태로 진행했다. 현행 업무를 50% 가까이 줄이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돌아보니 잘한 선택이었다.


① 농사펀드 2.0을 위한 여정 공유

역할을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전체를 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각 멤버들의 활동 내용과 그 자료가 어떻게 쓰일지를 정리하고 공유했다. 우리가 어떤 여정을 함께 할 것인지, 각자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 미리 그려보는 과정이었다.      

전체 진행 프로세스


활동과 결과물의 쓰임이 정해지니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조사할지 구체화되고 결과물에 대한 좋은 분석도 뒤따랐다. 과정을 통해 멤버들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한 단계 성장한 것 같다.  

    

② 사용자 인터뷰

농사펀드라는 사업 아이템만 있다고 가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농사펀드를 오랫동안 꾸준히 이용하는 사용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분들이 흔쾌히 시간을 내주셨고 농사펀드를 이용하다가 떠난 고객들도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해주었다. 이 내용을 몇 가지의 기준으로 다시 정리하고 농사펀드의 페르소나로 설정했다.      

고객 인터뷰 내용을 하나의 표로 정리했다.
핵심 고객과 확장 고객을 나누고 이미지화했다.

고객이 구체화되니 무엇을 원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또 멤버들끼리 핵심 고객을 생각하는 차이도 좁혀져 논의에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③ 잠재고객 설문조사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잠재고객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조사 문구를 만드는 일부터 진행 방식까지 기교 부리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이 영역은 우리에게 전문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 오픈서베이와 약 20차례의 메일을 주고받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설문의 형태를 정했다. 내부에서 얼마만큼 준비되어 있느냐에 따라 설문 결과의 품질과 활용도 달라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opensurvey를 통해 잠재고객의 니즈를 분석했다.

  

④ 미스터리 쇼핑

시장의 규모를 파악하고 그 안에 어떤 플레이어들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시장의 규모는 가능한 정량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통계청의 자료와 플레이어들의 인터뷰 자료를 모았다. 양쪽을 비교해 가며 시장을 나누고 농사펀드의 현재 위치를 파악했다. 그룹별 경쟁업체를 정하고 경쟁사 서비스를 실제 이용해보며 무엇이 좋고 불편한지,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확인했다. 2X2 매트릭스를 활용해 경쟁사 이용 경험을 단순화해보니 몇 가지 패턴과 중요한 기준을 알 수 있었다.

경쟁사 서비스 상호 비교를 통해 몇 가지 키워드를 도출했다.


⑤ 농부 다시 만나기

농사펀드의 비즈니스모델은 멀티사이드플랫폼(양방향 마켓플레이스)라고 규정하고 한쪽 측면인 농부도 다시 만났다. 이 주간에 걸쳐 경기도부터 남도와 섬까지 농부를 만나 이야기도 나누었다. 여러 가지 아쉬운 점들에 대해 들었지만 그 말머리에 "농사펀드라면... / 농사펀드라서..." 라는 표현이 많았다. 우리를 시장의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말이었고 좋은 신호라고 생각했다. 소비자 인터뷰 시 질문 설계를 했던 경험이 도움이 되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⑥ 비즈니스모델 다시 그리기

매주 한 번씩 전체 멤버들이 모여 서로 조사한 내용을 공유하고 그 안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린 캔버스와 비즈니스모델 캔버스로 우리의 핵심가치와 솔루션에 대해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어떤 툴이 우리에게 더 적합한지 고민했으나 도구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린 캔버스를 베이스로 비즈니스모델 캔버스에서 유용한 것을 차용했다.       

※ https://leanstack.com 을 이용해 그려본 린 캔버스


⑥ 정책과 기준 만들기

이것을 기반으로 농사펀드가 하는 일에 대해 정의서를 함께 만들고, 농사펀드 농부의 기준을 다시 정했다. 사업의 방식이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정하는 일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두 함께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워크숍 수준에 가까운 마라톤 회의였다. 하지만 한숨을 쉬며 마치던 회의가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멤버들은 쉬는 시간에도 삼삼오오 모여 논의를 이어갔다. 날이 어두워져도 누구 하나 대충 마무리하지 않았다. 우린 모두 농사펀드가 서서히 잊혀지는 서비스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농사펀드 농부 기준을 다시 정하기 위한 미니 워크숍 
문제 원인에 대한 해결방안 만들기 위한 미니워크숍
농사펀드의 서비스 형태를 정의하기 위한 미니 워크숍


⑦ 고객 되어 보기

중요한 정책과 기준을 다시 정하고 나서는 고객이 되어보기로 했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의 여정 지도를 그려보고 어떤 부분에서 서비스에 실망하고 불안함을 느끼는지 파악했다. 문제 원인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모았다. 기획자들은 이렇게 모은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서비스 기획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구체적인 것들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고객의 여정을 그려보고 감정선을 체크했다.

여기에서 고객은 소비자 70%, 농부 30% 비율로 반영되었다. 소비자의 요구에 대한 서비스 제공 결과물이 농부의 문제 해결을 견인할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각 과정 사이사이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글로 정리 못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자산이 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도 조금은 성장한 것 같다.          




2019년 05월 적용하기     


제철 먹거리를
가장 좋을 때 걱정 없이
우리가 응원하는 농부로부터

농사 펀드 2.0의 방향이 정해졌다. 정해졌다기보다는 뚜렷해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지난 6개월 동안 고민하고 논쟁하고 또다시 고민했던 것치고는 너무 단순해 보일지 모르겠다. 멤버의 말처럼 영혼을 갈아 넣은 것인데 ㅎㅎ     


펀드 형태와 구매형태를 지금보다 더 명확하게 구분하자고 했다. 보다 나은 먹거리를 위한 시도와 뚜렷한 목적성이 있는 상품이나 농부는 펀드 카테고리로, 좋은 품질의 먹거리를 가장 좋을 때 보낼 수 있는 상품이나 농부는 구매(예약, 상시) 카테고리로 나눌 예정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일하는 지도 더 잘 전달하려고 한다. 어떤 농부를 소개할지에 대한 기준도 명확히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활동도 실천할 계획이다. 이 일들은 모두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며 서비스에 순차적으로 적용할 계획이다. 그에 따라 플랫폼도 몇 번의 변화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런 시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질까? 

아직 모르겠다. 변화가 없을 수도 있고, 내일의 우리는 지금의 결정을 번복하고 다른 모습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한 멤버의 말처럼 이렇게 변해있을 것이다. 



농사펀드 2.0은 어떤 형태로 구현이 되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꿈을 더한 모습일 것 같다.



2019년 5월 20일
무능한 스타트업 대표 박종범의 참회록



작가의 이전글 남한과 북한의 토종벼로 짓는 밥 한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