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던진 자아성찰 질문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아름다운 수목원을 산책할 때 형형색색의 꽃, 개성 있는 나무에 감격하듯,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 새로운 시각으로 인해 즐거웠다. 맛있는 티라미스를 아껴먹는 것처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어야지"하며 애써 책을 덮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쿤데라와 나눌 대화에 가슴이 설레었다.
심오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철학적인 고찰로 가득 차 있다.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소설은 인간이라는 세계지도를 그려나가는 여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의 모든 각과 곡선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쿤데라의 인물들은 깊이가 있다. 오늘은 사비나와 프란츠를 통해 비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유부남인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푹 빠져있다. 그러나 이 연인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성향과 가치관을 가졌다. 예를 들어, 프란츠에게 진리 속에 산다는 것은 개인적 삶과 공적인 삶 사이에 구분이 없는 것이다. 비밀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비나와의 관계에 대해 짜릿함과 불안함을 느낀다. 반면,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 산다는 것은 의식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야만 가능하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 시선을 의식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것은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하는 길이며, 그러면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밀이 없는 삶과 모든 것이 비밀인 삶, 둘 중 무엇이 더 진실된 삶일까?
나는 몇 개월 전, 비슷한 고민을 한 경험이 있다. 강남역에서 간단한 설문조사에 응해달라는 대학생들에게 길이 막혔을 때였다. 개인적 선호사항을 묻는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나의 성격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으로 남이 있을 때만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있으니 남이 없을 때도 동일하게 행동하도록!"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여대생이 읽어준 내용이었다. 나와 대학생들 모두 헛웃음을 쳤다. 길 한복판에서 따끔한 설교를 들을 줄이야.
당황스러웠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사람은 사회적이기에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이 동기부여가 없다면,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무인도에서 그럴 것처럼 머리를 헝크러뜨리고 생얼로, 더우면 벌거벗고 다니겠지? 아니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레이어드 컷에 랩 원피스를 좋아하려나? 헝거게임에서처럼 나와 경쟁자 둘이 남았을 경우, 나는 상대에게 활을 겨눌 사람인가? 나는 살인자일까? 주변에 사람이 없어본 적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비나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참모습"을 모른다.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에 구분이 없는 "깨끗한" 사람일지라도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 속을 모르는 것이다. 목격자의 여부에 따라서, 그것이 누구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만이 우리의 한 모습임이 확실하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우리라면,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옳고 그름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것은 개개인의, 나아가 인류의 숙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