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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데이지 Mar 03. 2019

너무 빨리, 뜨겁게 달려가고 있진 않은가

베트남 배경의 영국 소설이 끼얹는 찬 물

<The Quiet American> Book Review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 소문난 맛집을 처음 방문하는 경험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영국 작가, Graham Greene의 <The Quiet American>을 읽으며 인생 전체에도 적용 가능하단 생각이 들었다.

1955년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화자는 중년의 영국 기자 Fowler이다. 아내와 딸이 영국에 있는 그는 스무 살 베트남 여인 Phuong과 동거하고 있다. 젊은 미국 스파이 Pyle이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런데 Phuong은 누구에게도 열정적이지 않다. 그녀는 결혼을 통해 서양으로 가서 안정된 삶을 꾸리길 원하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

이 삼각관계 속 두 남자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Pyle은 유부남 Fowler의 내연녀가 될 수밖에 없는 Phuong에게 자신을 선택하면 결혼해주기를 약속한다. 그는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사랑을 위해 전쟁터에서 여러 위험을 무릅쓴다. 반면, Fowler에게 Phuong은 그의 죽음의 날까지 외롭지 않게 아편을 태워주며 옆자리를 지켜줄 고분고분한 여인일 뿐이다. 혼자 죽기 싫어서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보통 삼각관계는 팽팽한 맛이 있는데, 이 삼각관계는 느슨하다. 어느 쪽도 달달하지 않다. Pyle은 자신의 신념에 가득 차 모든 행동이 무모하고 일방적이다. Fowler는 아이러니할 만큼 평정심을 지킨다. 젊은 경쟁자와 오랜 시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자상하기까지 하다.

두 남자는 전쟁에 대해서도 다른 태도를 보인다. Pyle은 사랑에서 처럼 일에서도 뜨겁다. 그는 베트남에 프랑스의 식민주의, 공산주의가 아닌 제3세력이 해결책이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희생된 폭격에 가담하기까지 한다. Fowler는 당시 미국을 상징하는 Pyle이 낙천적이며 거만하다고 지적한다. 그에 말에 따르면 전쟁은 정치인들이 어느 날 모여서 끝내자고 하면 끝나며, 그러면 전쟁 전의 평화 상태로 되돌아간다. 무고한 사람들은 헛되게 죽고, 잔인한 몇 년이 무의미하게 흘른 것이 된다.

이처럼 Fowler의 세계는 허무주의 감성을 동반한다. 그는 사랑, 전쟁뿐만 아니라 삶도 냉정하게 직시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신보다도 확실하다. 죽음은 삶을 송두리째 잃게 되는 것이고, 아무것도 더 이상 잃지 않게 되는 평화롭고 영원한 상태이다. 그래서 은밀히 죽음을 바란다. (일부러 위험한 동부로 가기도 한다.)


Death was the only absolute value in my world. Lose life and one would lose nothing again for ever.
죽음은 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다. 목숨을 잃으면 다시는 무언가를 잃지 않을 테니까.


 
뜨거운 이상주의자와 차가운 현실주의자 중 작가는 후자의 편을 든다. Phuong을 앗아갔던 Pyle은 호찌민에서 죽고 그녀는 Fowler에게 돌아온다. 그의 아내가 이혼까지 해줘서 이 커플은 해피엔딩이다. 사랑과 삶에 대한 기대가 컸던 한 사람의 패배는 우리에게 무겁고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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