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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데이지 Jan 19. 2020

한 장 소설1: 흔적

정사가 끝난 후 H는 가방에서 폴라로이드를 꺼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이불을 하복부까지 끌어당겼다. 고작 세 번 만난 여자가 꺼낸 카메라는 단연 위협적인 무기였다.

잠깐만.

셔터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어두운 방이 밝아지며 숨어있던 가구들의 윤곽이 훤히 드러났다. 미끄러져 나온 사진은 침대 옆 탁자 위를 포착했다. 그녀의 고무줄, 찢긴 콘돔 껍질, 모텔 방 열쇠. 401호라 적힌 목각 열쇠고리. 마치 수사를 위해 찍은 범죄현장 사진 같았다. 나는 나의 물건이 찍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런 걸 뭐하러 찍어

그녀는 까치발로 좁은 모텔 방을 활보했다. 한쪽 끝까지 걸어가서 머리를 휘날리며 방향을 틀어 다시 반대로 걸어왔다.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난 매번 그래.  

그러더니 TV 앞에 멈춰 섰다.

다 일회용이야. 내일이면 이 방은 완전히 리셋되겠지?

포장된 참빗을 들어 비닐을 뜯고 머리를 빗었다. 머리카락 한 두 가닥이 그녀의 나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곳의 역사도 그렇게 사라져... 모텔의 역사라고 들어봤어? 아무도 그런 건 기록하지 않아.

그녀는 세상의 부조리를 처음 맞닥뜨린 아이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우연과 욕망의 산물인 하룻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단 듯이 말이야. 그런데 어떤 사건이 안 그래? 나도, T도 우연과 욕망의 교차로에서 태어났는 걸?

 그녀는 내 다리 위에 살포시 몸을 포개고 검지를 들어 내 배꼽 주변으로 원을 그렸다. 원이 소용돌이가 되어 치골 위를 맴돌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도 의미가 없지. 속으로 되뇌었다. 이렇게 잠시 있다 없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모텔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처럼 인생도 걸어 나가면 끝이라는 그 덧없음은 다른 말로 자유였으니까.

모든 만남은 분명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겨.

H가 내 허벅지에 뺨을 대고 누운 채 속삭였다.

몸으로 지은 죄는 몸에 남아서 속죄할 수 없다. 뭐 그런 청교도적 교리를 말하는 거야?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설교는 화가 난 하룻밤 상대에게 오는 문자와 같았다. 나에게 짐을 얹고 족쇄를 채우려는 귀찮은 것들이었다.

조금 다른 얘긴데... 그거 알아?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요가에서도 그런 말을 해. 나의 모든 경험은 사람의 몸에 저장된다고. 그래서 수련을 통해 내 보내야 한대.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 쉬면서. 하여튼. 다들 흔적을 없애려고 난리라니까.

그녀는 두 손으로 내 허벅지 양 옆을 짚고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엉덩이가 천장 등을 가려 그 실루엣이 마치 일출 때의 산봉우리 같았다. 그녀가 내쉬는 숨과 함께 산사태가 일어났고, 부드러운 입술과 가슴이 차례로 내 허벅지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재치고 몸을 활처럼 휘게 했는데, 맞닿은 골반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녀가 숨을 마시면 흉부가 풍선처럼 차오르며 무게가 가벼워졌고, 내쉬면 어깨가 내려오며 골반이 지긋이 나를 눌렀다.

사람에게 망각의 욕구가 있다는 게 싫어. 망각한다는 건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는 거잖아. 비겁해. 아니, 슬퍼. 잊기보단 잘 처리하고 저장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만남이든 아름다움이 있는 법이니까.

과거의 여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각자 곡선과 향, 촉감이 뒤엉킨 기억이었는데, 나는 그 기억들을 “다시 하고 싶다”와 “다신 하고 싶지 않다” 두 부류로만 분류해 놓았다. H는 방금 전자로 저장했고,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에 내 세포들이 다시 경험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맞는 것 같아. 몸과 마음에 저장된 다는 말.

그녀가 턱을 내려 나를 보며 웃었다.

지워지지 않을 거야. 아무리 요가를 해도. 이왕 기억할 거면, 음... T의 방에 대해 말해줘.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책상과 침대가 있는 평범한 방이라고 말했다.

창문은? 햇살이 들어와?

나는 그렇다고 했다. 오전보다는 오후에.

이불은?

파란색 체크무니.

좋아. 우린 오늘 거기에 있던 거야. 오후 햇살을 맞으며 T 파란 이불 위에서. 이불은 색이 있고 보풀도  나있어야지.  이불은 너무  하얗잖아. 거짓말 같이.

나는 이불을 끌어 그녀 머리 위로 덮었다.

따뜻하면 됐지

그녀가 서서히 애무하기 시작했고 나는 자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율했다.


아침엔 복도로부터 들리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나는 청소부와 어색하게 목례를 나누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젊음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가 칙칙했고, H가 밤새 이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했다는 게 믿기 힘들었다. 거리는 눈이 부시게 밝았다. 그녀는 언제 나간 걸까. 모텔에 대해 불평하면서 나와 그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망각이 싫다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걸어 나가다니. 그녀의 모순이 야속했다. 사진 한 장으로 해결된 그녀의 모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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