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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호수 Jan 30. 2021

엄마의 냉장고

 엄마의 냉장고, 특히 냉동실은 추억의 저장소 같다. 몇 년 전에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원두커피를 선물 받았지만 카페인 민감증 때문에 엄마는 커피를 드시지 못하시고 고스란히 냉동실에 보관해두셨다.


 "엄마는 어차피 커피 못 마시면서 왜 남한테 주거나 요리하는 데라도 쓰지 않은 거예요?"


"그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커피 만들어 줄라고 보관해둔 거야.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걸 선물하거든. 자기가 좋아하는 커피니까 나한테도 선물했겠지. 나는 커피 마실 줄 모르니 살 줄도 모르고. 그런 내가 산 것보다는 이 커피가 그 친구 입맛에 맞을 테지."


"그런데 이렇게 오래돼서 어째? 이제 친구가 와도 줄 수도 없겠다. 버릴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자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집이 멀어져서 만나기가 힘드네. 버리지 말고 놔둬. 한 번씩 볼 때마다 친구 생각이나 하게."

 정리 전문가가 들으면 기겁할 내용이지만 나는 커피를 다시 비닐에 잘 싸서 한쪽 구석에 잘 넣어두었다. 엄마가 요리 재료를 찾다가 문득 친구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냉장고 한쪽 구석 자리쯤 포기해도 괜찮을 듯했다. 


 그리고 냉동실 문짝 가장 아랫단에는 김부각이 3장 정도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있었던 김부각인데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하루는 엄마에게 저거 꺼내서 튀겨 먹자 하고 부추겼다. 


"그래? 먹고 싶니?"


라고 하시고는 엄마는 가만히 앉아계셨다. 


 엄마의 목소리는 무언가 목에 걸린 듯이 덜그럭 거렸고, 나지막했고 느리게 흘러나왔다. 원인 모를 주저함이 느껴져서 나는 엄마가 이게 아까워서 그러시나 싶었다.


 "엄마 이런 것도 오래되면 쩐내 나서 맛없어요. 기름 살짝 두르고 내가 튀겨줄게. 나 많이 해봐서 진짜 잘해. 시가에서 매년 만들어서 보내주시거든. 처음엔 태우거나 덜 익히거나 했는데 이제 진짜 잘해. 이거 잘 튀기면 진짜 맛있어요."


 그러고 보니 시가에서 얻어먹기 전에는 김부각이라는 게 뭔지도 모를 지경이었으니 냉동실에 시꺼먼 이것의 정체가 김부각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최근이었다.


 엄마가 이거 튀길 줄 몰라서 저러시나 싶어 이번 참에 냉장고도 정리하고 맛있는 것도 만들어드려야지 하면서 어느샌가 착 가라앉은 공기를 느끼며 과하게 밝은 척을 했다. 


 엄마는 내가 그러는 양을 가만히 놔두셨다. 김부각을 꺼내 들어 튀기려는데 김부각의 모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네모 반듯하게 잘려서 각 잡힌 김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가지런히 깨가 붙어있는 것이 얌전하기 이를 데 없는 대갓집 큰며느리의 솜씨였다. 


그 순간 갑자기 깨달았다.


"이 김부각은 외할머니께서 만드신 거구나."


 외할머니는 음식도 잘하시고 손재주가 정말 뛰어난 분이셨다(할머니는 대갓집 막내며느리셨다). 하루는 말린 오징어를 먹는데 할머니께서 오랜만에 솜씨 좀 부려볼까 하시더니 가위로 오징어를 자르기 시작했다. 어린 나는 오징어로 대체 무슨 솜씨? 하면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할머니의 가위질 끝에서 오징어 한 마리가 화려한 봉황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오징어 몸통을 가늘고 길게 자르면 꽃 모양으로 돌돌 말리는데 그걸로 봉황의 몸통과 깃털을 만들고 다리는 꼬리깃이 되었다. 오징어 머리의 삼각형 뾰족한 부분도 가위질 몇 번에 날렵하고 우아한 봉황의 머리가 되었다. 이에 감복한 어린 시절의 나는 한동안 가위와 종이를 들고 다니며 봉황 오리기에 심취했다.


찾아보니 오징어오림 공예라는 이름으로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할머니의 오징어 봉황이 훨씬 멋있었는데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할머니가 만드신 김부각이라는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엄마의 옷장을 구경할 때였다. 그날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살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베테랑 살림꾼 엄마의 옷장에 설익은 훈수를 두는 중이었다. 


"어머 이거 대체 언제적 옷이야? 안 입은 지 5년도 넘은 것 같은데?  한번 펼쳐본 적도 없는 것 같네. 맨날 옷장 좁다고 그러지 말고 이런 거 버려요"


 하면서 곱게 개켜진 스웨터를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뭘 하든 그러녀니 하고 내버려 두시던 엄마가 갑자기 뛰어와서는 내 손에서 스웨터를 낚아채갔다.


"안돼, 이거! 그냥 놔둬. 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집에 잠깐 와 계실 때 개어주신 거야. 할머니 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씩 쓱 만져본다고.
그렇게 할머니 손길을 느끼는 거야……”


 내가 스웨터를 펼쳐버릴까 봐 다급했던 엄마의 목소리는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차츰 잦아들었고 살짝 목이 메인 것 같았지만 슬퍼하는 음색은 아니었다. 방금 하신 말씀을 시범이라도 보이듯이 엄마는 스웨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는 내 경솔한 행동이 엄마의 소중한 추억을 망가뜨릴 뻔한 것에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저 엄마를 보고만 있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멈출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할머니에 대한 엄마의 마음 한 조각을 보게 되어 또한 마음이 저려왔다. 


 나도 언젠가는 엄마와 이별을 하겠지. 그러면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셔서 개어주신 옷을 차마 펼쳐서 입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옷장 구석에 곱게 넣어두고는 엄마 생각이 날 때마다 한 번씩 꺼내어 쓰다듬어 보겠구나.


 냉장고의 김부각도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거라 그대로 놔두신 거구나. 아이고 저걸 내가 먹고 싶다고 홀랑 꺼내서 튀겨먹었으면 엄마 마음이 어땠을까. 어째서 말리지 않았을까. 자식이 먹고 싶다고 하니 차마 말릴 수조차 없으셨나. 이렇게 애달픈 엄마의 추억일 텐데 왜 이렇게 나에게 다 내어주실까. 그런 엄마도 언젠가는 나보다 먼저 떠나시고 혼자 남은 나는 지금 나의 엄마가 할머니를 추억하듯 엄마를 추억하겠지라는 생각을 하면 눈물부터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냉장고에 김부각을 다시 집어넣었다.


“생각해보니 튀길려니 좀 귀찮네요. 몇 개 되지도 않는 거 튀긴다고 기름칠에 치우려면 힘만 들지. 나중에 해 먹지 뭐. 그냥 사과나 하나 깎아 먹을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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