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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호수 Feb 06. 2021

엄마와 할아버지, 그리고 내 딸과 내 딸의 아빠



 

우리 엄마는 1950년에 태어나셨다. 6.25 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태어나시기 전에 이미 전쟁에 군인으로 나가셔서 소식이 끊기고, 결국 전사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그러니까, 유복녀였던 것이다. 엄마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정이 너무나 그립고, 아버지, 아버지 하며 아버지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혼자 “아버지”하고 몇 번씩 불러보았지만 허전한 마음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고 하셨다. 

엄마는 결혼하고 나서야 시아버지가 생겨서 아버지 대신 아버님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2년쯤 지나자 아버지를 불러보지 못한 허전함이 많이 가셨다고 한다. 나의 할아버지였던 엄마의 시아버지는 넷째 며느리였던 엄마를 특히나 예뻐하셨는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엄마야말로 시아버지를 정말 아버지처럼 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나의 할아버지는 우리 엄마를 특별히 아끼시고 늘 “아가야”하면서 다정하게 부르고 가끔 뒤꼍으로 데려가 몰래 용돈을 쥐어주기도 하셨다고 한다. 과일이나 다른 먹을 것을 싸주시기도 하고. 

할아버지께서 좀 더 오래 사시면서 엄마에게도 아버지의 정을 더 나눠주시고 나에게도 할아버지의 정을 나눠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엄마 결혼 후 4년쯤 뒤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에게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외할아버지 역시 엄마가 태어나시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어느 쪽으로나 할아버지를 모르는 셈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날 엄마의 꿈에 다녀가셨다고 한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지긋이 엄마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가시는 뒷모습을 꿈으로 꾸고 아버님 아버님을 부르다가 깼는데, 그날 새벽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자식들도, 다른 며느리들도 아무도 할아버지 꿈을 못 꾸었는데 넷째 며느리인 우리 엄마만 할아버지 가시는 꿈을 꾼 것이다. 엄마는 그 얘기를 하실 때면 “아버님이 딱 나한테만 들렀다가 가셨어”라고 하신다. 마치 할아버지가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인사하고 가신 것이 특별한 애정표현이라도 되는 느낌이다.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친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그립고 고마워하시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의 꿈으로 찾아오신다. 오빠와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미소 지으며 엄마를 쳐다보신다고 한다. 정말로 할아버지의 혼백이 저승에서 우리 엄마와 우리들을(심지어 나는 할아버지의 기억조차 전혀 없다) 지켜주시는 것일 수도 있고, 엄마의 무의식 중에 집안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사람이 할아버지인 것일 수도 있지만,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느꼈던 아버지의 정이 특별함은 확실하다. 나는 그렇게 엄마의 꿈 얘기를 통해 기억이 없는 할아버지의 정을 느낀다.

 엄마는 때로 나를 질투하셨다. 올곧이 아버지의 정을 다 받고 자라는 나를. 

“네 아빠가 너를 이뻐하는 모습을 보면 한 번씩 부러운 생각이 든다. 나는 저런 정을 못 받아봤는데…..”

그럼 나는 복잡한 감정이 생긴다. 엄마가 안쓰럽다는 마음과 내가 받는 사랑이 과분한 것인가 하는 부담감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 

내가 아이를 낳고 남편이 내 딸에게, 아니 우리의 딸에게 하는 행동을 보니, 엄마의 부러운 마음이 천만분의 일쯤? 짐작이 갔다. 

남편이 딸에게 애정을 쏟는 걸 보면, 내가 주는 사랑과는 다른 종류 혹은 형태라는 게 느껴진다. 아이도 그걸 느낀다. 아이에게는 엄마의 사랑과 아빠의 사랑이 다 필요하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가족형태가 있을 수밖에 없고 엄마 아빠만이 엄마 아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에게는 두 명 이상의 성인이 주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필요하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도 나란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장점이 있어서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 다행이다. 제대로 사랑받는구나. 나는 받지 못한 걸 내 딸아이라도 받아서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든다. 이 생각은 어쩌면 좀 이상하다. 나는 할아버지가 없었을 뿐 아버지는 있었고 아버지는 나를 굉장히 사랑하셨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내 딸아이를 사랑하는 걸 보면

“좋겠다. 그런 사랑받아서”라는 생각이 불쑥 솟아난다.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을 때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일까?  나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내뱉었을까? 아이를 낳고 난 후에 느끼는 엄마와의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엄마는 어쩌면 그럴 수 있었어? 엄마가 그랬던 게 이해돼. 이 두 가지가 마구 섞인다. 내 감정이 내 것인지, 엄마 것인지 가끔 혼동이 된다. 

육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꾸 엄마의 이야기를 쓰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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