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줄거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의 추천으로 한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 굳이 번역하자면 ‘관심 구역’ 정도일까요? 상영관이 없어서 찾다가, 롯데시네마 신도림에서 하루에 한 번 상영한다는 것을 알고 급하게 예매했습니다. 예술영화 의무상영이라는 규제 속에, 30명 정도 들어가는 작은 상영관에서 영화는 시작됐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러닝타임 104분 내내 참 불편한 영화였습니다.
아우슈비츠 사령관이라는 극악무도한 인물을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려내는 영화는, 화려한 연출 없이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아름다운 풍경과 섬세한 미장센은 극악무도한 현실과 대비를 이루며 더욱 잔인하게 다가옵니다. 담장 하나를 공유하는 수용소와 주택이 나란히 존재하는 공간 구성은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소장 루돌프 회스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실화입니다. 아우슈비츠라는 극악무도한 현장 바로 옆에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단순히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악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의 평범한 일상과 그 이면에 숨겨진 심리를 깊이 있게 파헤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잔혹한 모습보다는, 수용소 벽을 사이에 두고 살던 소장 루돌프 회스 가족의 평범한 일상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아이들과 웃으며 놀고, 저녁 식사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악몽 같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 평화롭습니다.
영화 초반, 회스 부부가 아우슈비츠 옆 저택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장면은 충격을 안겨줍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웃음소리는 끔찍한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회스는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일상처럼 처리하며, 집에서는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살아갑니다. 영화는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극대화하고,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회스 소령의 생일을 맞아 가족들이 정원에서 카누를 선물하는 초반 장면에서 모두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듭니다. 생일 선물로 받은 카누에 몸을 싣고 물 위를 가르는 그들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수용소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는 회스 가족의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그 소리들이 일상의 배경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듯합니다.
장교 부인들의 모습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징발된 물품을 나누어 가지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에서 약탈을 즐기는 약탈자들을 연상시킵니다. 특히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가 밍크 코트를 입어보며 만족해하는 장면은 좌석에서 일어나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영화 속 검은 개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지옥의 파수견처럼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검은 개는 악의 상징입니다.
회스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은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회스는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하고, 아내는 그러한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이 장면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평범한 가정을 가지고 있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회스 가족이 수영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수영장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관객들은 극심한 불편함을 느낍니다. 수영장의 맑은 물은 희생자들의 피를 연상시키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섬뜩하게 들립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잔혹성과 무감각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회스는 혼자 방에 앉아 독백을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믿으며, 역사에 남을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은 악의 평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회스는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회스의 아이들은 수용소 근처의 숲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아버지와 함께 숨바꼭질을 합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영화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과 대비되며, 관객들에게 묘한 불쾌감을 선사합니다. 잔디를 뽑으며 "이놈의 잡초들"이라고 투덜대는 회스의 와이프 헤트비히의 모습은 마치 수용소에서 학살되는 유대인들을 잡초에 비유하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회스는 낚시 도중 유대인의 뼈를 건져 올리고, 아이들은 그 뼈와 유대인을 태운 재에 오염됩니다. 잡초와 재, 이 두 가지는 모두 제거해야 할 대상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비유를 통해 회스 가족의 삶이 얼마나 많은 죄악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죄의식 없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들의 행복은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영화 내내 수용소 담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들은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비명소리, 총성, 그리고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굴뚝연기는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암시하며, 회스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과 대비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계속 암시하면서도, 카메라는 회스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그의 평온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회스 가족은 종종 수용소 담 너머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담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무관심하게 바라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냉혹한 무관심과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회스 가족이 수용소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윤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악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영화는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고, 관객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합니다(하지만 제가 느낀 답은 없습니다).
실존 인물인 회스 중령은 초대 아우슈비츠 소장으로서 하루 최대 2,000명을 가스실에서 살해할 수 있도록 수용소 시설을 정비하고,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5월부터 단 56일 만에 무려 44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수송해 대부분을 가스실에 처넣은 이른바 ‘회스 작전’(영화에서 회스는 이 작전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합니다)을 펼쳐 아우슈비츠를 홀로코스트의 대명사로 만들었습니다.
회스는 독일 패전 이후 숨어 살다가 영국 정보부에 붙잡혀 폴란드로 넘겨진 뒤 사형을 선고받고 아우슈비츠에 마련된 교수대에 오릅니다. 교수대에 오르기 전에 그는 고백록을 남기는데,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을 "나치 독일이 만든 거대한 학살 기계의 톱니바퀴"였다고 적었습니다.
“그렇다. 내 가족은 아우슈비츠에서 잘 살고 있었다. 내 아내, 그리고 내 아이들이 원했던 것은 모두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그리고 구김살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아내는 정원에 훌륭한 화단을 가지고 있었다. 억류자들이 내 처와 내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거나 혹은 주의를 끌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잘 해주었다. (“헤스의 고백록”, 2006. 범우사)
- 출처,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좀 더 심도 깊은 영화 평가는,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5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