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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Nov 01. 2023

<원더풀 라이프(ワンダフルライフ)>(1999)

판타지적 설정과 다큐멘터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두 번째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고 떠올린 영화가 있다. 흑백영화 시대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1946)이다. 평생 남을 위해 살았던 소시민 조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 분)가 절망에 빠져 자살을 결심했을 때, 천사 클로렌스(헨리 트래버스 분)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조지를 구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멋진 인생>의 영어 원제에는 Wonderful Life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기에, 고레에다의 <원더풀 라이프>가 카프라의 <멋진 인생>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카프라의 <멋진 인생>의 일본어 제목은 <멋지구나, 인생(素晴らしき哉、人生)>이라 <원더풀 라이프>(ワンダフルライフ)와는 거리가 있다. 고레에다의 <원더풀 라이프>의 영어 제목은 Wonderful Life가 아니라 After Life이다.


제목의 유사성을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 보기에는 내용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천사가 등장해서, 죽음에 임해서 그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보여준다. <멋진 인생>에서 천사 클로렌스는 조지 베일리에게 그가 태어나지 않았던 평행세계를 보여준다. 그 평행세계에서 조지의 주변 사람들은 죽거나 불행에 빠져 있다. 클로렌스는 조지는 누구나 혼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조지는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쯤에서 카프라의 <멋진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고레에다의 <원더풀 라이프>에 대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 <원더풀 라이프>는 설정이 가장 중요한 영화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죽고 나면 누구나 림보라는 공간에서 6일의 시간을 보낸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천사와의 면접을 갖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을 결정한다. 그러면 천사들은 목요일과 금요일에 선택된 기억을 영화로 만들고, 토요일에 죽은 이들은 그 영화를 감상한다. 죽은 이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소중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저승으로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원더풀 라이프>는 그 일주일 동안 천사들과 죽은 이들이 대화를 통해서 영화를 완성시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실 <원더풀 라이프>는 내용상 <멋진 인생>과 큰 차이가 있다. <멋진 인생>에서 클로렌스가 조지에게 평행세계를 보여준 것은 어디까지나 조지의 자살을 막기 위한 특별한 조치였다. 반면에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 뒤에 림보에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영화로 본다. 과연 필자의 추측처럼 고레에다의 오마주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지는 이 글을 읽은 독자들(혹은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원더풀 라이프>의 설정 자체는 판타지지만, 이렇다 할 특수효과는 등장하지 않는다. "림보"라는 설정의 건물은 아무리 봐도 그냥 오래된 건물이고, 천사들은 등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신비한 마법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죽은 이들 역시 유령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그 자체다. 천사들은 죽은 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죽은 이들은 그에 대답하며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이야기한다.


영화에서는 십여 명의 인물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일부는 전문 배우지만, 일부는 일반인이 실제로 자신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일반인이 자신의 실제 기억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즉 고레에다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담당했던 다큐멘터리를 이 영화에 도입한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동시에 전개하는 시도는 흥미롭다. 다만 실제 사실 부분과 픽션 부분이 눈에 띄게 구분되기 때문에 자칫 영화 전체의 개연성이 붕괴하기 쉽지 않은가 하는 유려도 든다.


인생에서의 가장 소중한 기억이라는 질문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여고생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죽은 이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사연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병리가 엿보인다. 어느 여고생은 친구들과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을 선택하지만, 천사인 사토나카는 디즈니랜드에서의 기억을 선택한 사람이 수십 명이라고 말해준다. 어느 중년 남성은 인생에서 소중한 기억은 없었다며 장롱 안의 어둠 속에 있었던 기억을 선택한다. 끝내 가장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지 못하고 기한을 넘긴 청년도 있다. 이들의 사연을 보면서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이 겪는 불행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사례들은 일반인의 실제 사연이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를 위해 전문 배우들이 연기한 부분이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캐릭터는 천사 모치즈키(이우라 아라타 분)와 사토나카(오다 에리카 분)다. 이우라 아라타는 드라마 <언내추럴>(2017)에서 처음 접하고 말 끝마다 욕설을 하는 까칠한 아저씨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반면에 이 영화에 나온 신인 시절의 이우라 아라타는 순둥이 청년 그 자체여서 신선하게 느껴진다.


오다 에리카는 이 영화에서는 동료 천사인 모치즈키를 연모하는 배역을 잘 소화했다. 특히 모치즈키가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쌓인 눈에 화풀이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이후 지금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우라 아라타와 달리 출연작이 별로 없어서 아쉬운 배우다.



이러한 스토리에는 역사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주인공 모치즈키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한 인물이다. 생전에 연인 사이였던 교코를 잊지 못해서 승천하지 못하고 림보에 머무르고 있다. 자신이 죽고 나서 교코가 결혼한 남편 와타나베를 담당하면서 자신에 대한 교코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승천하게 된다.


1995년은 태평양전쟁 종전 50주년 되는 해였고, 20세기의 끄트머리에 개봉한 <원더풀 라이프> 역시 그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모치즈키는 본의 아니게 전쟁에 참가해 생명을 잃은 희생자로 그려진다. 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은 나쁘지만, 실제로 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이들은 희생자라는 관점은 일본에서는 비교적 일반적인 관점이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고레에다 감독의 인식조차 그렇다.


실제로 전사자들 중에는 징병을 당해서 본의 아니게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 역시 국가가 일으킨 전쟁의 희생자라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옹호하는 논리 중 하나다. 물론 야스쿠니 신사에는 그러한 전사자들뿐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거나 잔학한 행위를 한 전쟁범죄자들 역시 합사 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치즈키를 전쟁의 희생자로 그린 <원더풀 라이프>는 일본의 역사인식의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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