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욱 Mar 06. 2022

<초속 5센티미터>의 여행

<너의 이름은.>으로 유명한 신카이 마코토(新海誠)의 작품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초속 5센티미터>(2007)다.


<초속 5센티미터>는 타카키와 아카리의 이야기를 담은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1부 <벚꽃 이야기>는 중학생 타카키가 아카리를 만나러 도쿄에서 도치기로 전철을 타고 가는 내용. 


초등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며 좋아하는 사이였던 타카키와 아카리는 아카리가 도치기(栃木)로 전학을 가면서 헤어지게 된다. 핸드폰도 없던 1994년,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던 두 사람. 타카키는 중학교 1학년이 끝나는 3월 4일, 아카리를 만나러 도치기로 가는 계획을 세운다. 


비가 내리는 1994년 3월 4일 금요일 방과 후, 타카키는 미리 조사해 둔 전철 시간표 메모와 전자시계를 들고 여행을 떠난다.


우연히도 올해 3월 4일 역시 금요일이다. 참고로 다음에 3월 4일이 금요일인 해는 2033년이다. 11년이나 기다려야 하다니.


그리고 영화 <초속 5센티미터>가 개봉한 날은 2007년 3월 3일. 올해는 15주년이다.


이런 날을 놓칠 수가 없다. 3월 4일, 타카키의 여정을 따라가는 여행을 떠났다.


아카리: 제가 사는 역까지 와 준다니 고맙습니다만, 머니까 조심해서 와요. 약속한 날 7시에 역 대합실에서 기다릴게요.(*편지 속 문장이라 존댓말을 쓰고 있다.)

    

타카키가 수업 끝나고 출발한 역은 오다큐(小田急) 고토쿠지(豪徳寺) 역이다. 오다큐는 도쿄 신주쿠와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사이를 잇는 전철 노선이다. 도쿄 외곽과 가나가와 서부의 주택가에서 도쿄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타카키가 고토쿠지에서 전철에 탄 것은 15시 54분. 하지만 28년 동안 전철 스케줄도 당연히 바뀌었다. 특히 2001년 쇼난 신주쿠 라인이 개통되면서 신주쿠-오야마 구간은 타카키가 다니던 시절보다 소요 시간이 줄었다. 나는 16시 8분에 출발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뀐 영화와 달리, 2022년 3월 4일은 쾌청한 봄 날씨였다.

타카키: 신주쿠 역에 혼자 온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로 탈 노선도 모두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곧 아카리와 만난다.

전 세계에서 이용자가 가장 많은 역으로 유명한 신주쿠역은 미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갈 때마다 헤맨다. 다행히도 오다큐에서 JR로 갈아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전철에 타는 게 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금요일 5시 대에 도쿄에서 사이타마 쪽으로 가는 전철은 퇴근길 지옥철이 시작되었다.

타카키: 터미널 역은 귀가하는 사람들로 복잡했고, 모두들 신발이 눈에 젖어 축축했고, 공기는 눈 오는 날의 도시 특유의 냄새가 나면서 차가웠다. 

신주쿠에서 사이타마현 오미야(大宮) 도착. 도쿄 북쪽의 베드타운 오미야는 군마현 다카사키(高崎)로 향하는 다카사키선과 도치기현 우츠노미야(宇都宮)로 향하는 우츠노미야선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사실 현재는 신주쿠에서 우츠노미야 방면으로 가는 열차를 골라 타면 굳이 오미야에서 갈아타지 않아도 되지만, 타카키의 여정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오미야 역에 내려서 갈아탔다.


순조로워 보이던 타카키의 여정은 눈 때문에 열차가 지연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전철 안내 방송: 우츠노미야행 전철, 눈 때문에 10분 지연됩니다. 바쁘신 가운데 죄송합니다.
타카키: 그 순간까지 나는 전철이 지연될 가능성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이 커졌다.
타카키: 오미야 역을 지나고 조금 있자, 풍경에서 갑자기 건물들이 사라졌다. 역과 역 사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었고, 전철은 역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정차했다. 창 밖에 펼쳐진 본 적도 없는 눈 밭도, 느릿느릿 흐르는 시간도, 아픔과도 같은 허기도, 나를 더욱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약속 시간이 지나서 지금쯤 아카리도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퇴근 시간이 된 오미야 역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외곽으로 가면 갈수록 승객도 줄어들었다. 오미야까지가 수도권이라면, 그 밖은 시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 때문에 전철이 지연되고 초조한 타카키와 달리 나는 순조롭게 오야마(小山) 역에 도착했다. 우츠노미야에 가는 도중에 있는 오야마 역은 신칸센도 정차하는 나름대로 큰 역인데, 여기서 료모(両毛) 선으로 갈아탔다. 료모선은 우츠노미야선 오야마와 군마현 다카사키를 잇는 노선인데, 열차가 30분에 한 번 밖에 없었다. 

타카키: 전철은 그때부터 2시간이나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서 있었다. 단 1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고, 시간은 분명한 악의를 가지고 나를 천천히 지나쳤다. 나는 이를 꽉 물고 어떻게든 울지 않기 위해 버틸 수밖에 없었다. 아카리, 부디 집에 돌아가 있어.


타카키가 약속 장소인 이와후네(岩舟) 역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간으로부터 4시간 15분이 지난 11시 15분. 그 이후의 전개는 직접 영화로 확인해 보시길^^

이와후네 역은 내리는 사람도 거의 없고,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이다.

이와후네 역의 시간표. 출퇴근 시간이 아니면 한 시간에 한 번 밖에 전철이 다니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시골에나 있는 역이다.


역 대합실에는 한 쌍의 남녀가 먼저 와 있었다. 처음 보는 내게 말을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역 대합실 장면에 사용된 역은 아오모리에 있는 역이고, 벚나무는 요요기 공원에 있는 나무라는 등). 그들은 <초속 5센티미터>가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일(즉, 3월 4일 금요일) 결혼하고 나서 이와후네 역까지 왔다고 한다. 여러모로 대단하다. 3시간 가까이 되는 여정에 피곤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행복을 빌며 귀가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마네 현 여행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