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우리가 가까워지던 봄
봄이 길게 이어졌다.
벚꽃은 다 져버렸지만,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다.
창문을 열면 꽃잎 대신 바람이 들어왔다.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수아 생각이 났다.
같은 교실, 같은 자리, 같은 목소리.
그 모든 게 너무 익숙해서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 때마다
괜히 한 번 더 바라보게 됐다.
며칠 전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다시 나가자.”
그 한마디가 너무 가볍게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몇 번 겪은 대화였다.
“좋은 학교 알아봤다.”
“이번엔 다시 적응해야 한다.”
말은 ‘기회’였지만,
나한테는 ‘이별’이었다.
이번엔 정말, 마음이 준비가 안 됐다.
그때는 그냥 떠났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두고 가야 하니까.
요즘은 수업이 잘 안 들렸다.
칠판 글씨보다
수아의 필기체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 애가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면
그 사소한 동작조차 눈에 밟혔다.
이상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하루가 자꾸 수아로 채워졌다.
쉬는 시간에
수아가 내게 말했다.
“요즘 너, 이상하게 조용해.”
“그냥 피곤해서.”
“피곤해서 그런 얼굴은 아닌데.”
“그럼 어떤 얼굴인데.”
“... 멀리 있는 얼굴.”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그 애는 모르겠지만,
진짜 멀리 가야 할 사람이 나였다.
그 순간부터
‘멀리’라는 단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 애가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게
괜히 미안했다.
점심시간,
친구들이 우산 얘기를 꺼냈다.
“이번 주에도 비 온대.”
“또 같이 써야겠네~”
“야, 지난번에 둘이 우산 썼잖아!”
애들이 웃으며 장난쳤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숙였다.
“그냥 우산 하나밖에 없었어.”
“그래그래~ 비 핑계로 같이 썼다며~”
“아니라니까.”
수아가 고개를 숙였다.
볼이 살짝 빨갰다.
그 모습을 보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진짜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날이 내 인생에서 제일 좋았던 하루였다는 걸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쉬는 시간,
수아가 조용히 물었다.
“너도 그날 놀림받았어?”
“조금.”
“창피했지?”
“아니, 그냥... 기분이 좀 이상했어.”
“이상해?”
“좋았던 거 같기도 하고.”
“좋았다고?”
“...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수아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대신 창밖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빛에 비쳐서
잠깐 눈이 부셨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 애를 진짜 좋아하게 됐다는 걸.
그날 오후,
아빠가 학교 앞에 왔다.
차 안에서 내 성적표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유학 다시 가야지. 여긴 네가 있을 자리 아니야.”
“나, 여기 괜찮은데.”
“괜찮다는 게 뭔데?
안주하면 평범해진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학교 담장,
수아가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평범한 뒷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세상에서 제일 평범한 장면인데,
내겐 그게 세상에서 제일 특별했다.
밤에 책상에 앉았다.
수아가 쓰던 글씨체가 자꾸 떠올랐다.
‘멀리 있는 얼굴’이라고 말하던 그 표정도.
나는 연필로 천천히 적었다.
나에게는,
평범한 하루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한참을 그 문장을 바라봤다.
‘평범한 하루’라는 게
그 애와 함께 있는 오늘이라는 걸,
그때는 아직 몰랐다.
다음 날 아침,
교실 창문으로 햇살이 깊게 들어왔다.
책상 위에 반사된 빛이
수아의 손등 위에서 잔잔히 흔들렸다.
“오늘은 진짜 봄 같지?”
수아가 물었다.
“응. 이상하게 오늘은 공기가 다르다.”
“곧 여름이 올 거야.”
“응… 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
그 애가 웃었다.
그 웃음이 햇살에 묻혀 반짝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마음이 커질수록,
말은 짧아졌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