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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GO Oct 11. 2019

나는 바보였다. (1)

나의 미련한 선택에 대하여.


1. 런던에 와서 처음으로 구한 일은 카페 일이었다. 한국에서의 경력은 런던에선 당연히 무용지물이었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던 일은 웨이트리스 혹은 바리스타 같은 일이었다. 20대 후반에 이 곳에 와서 나는 마치 내 자신이 제로(Zero)가 된 기분이었다. 영어도 못해, 나의 전공이며 그전에 했던 일이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마치 여기서 다시 제로라는 바닥에 서서 나의 삶을 꾸려가야만 했다. 천천히 구직을 하는 동안 한국에서 가져온 돈이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제발 아무 데나 들어가서 열심히 하자, 싶을 때 난 카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카페에서의 일들은 따로 글을 써보고 싶다.


어쨌든 카페에 들어가 온몸에 커피 냄새 잔뜩 베어가며 일을 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에서 13개월을 보냈다. 본의 아니게 그 카페에서 나는 제일 오래 일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새로 들어온 동료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같이 일해본 한국인들 일 자주 바꾸던데 너는 진짜 오래 일한다."


몸 많이 쓰는 바쁜 카페에서 13개월을 있더니 본의 아니게 끈기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권태기가 왔다. 이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자마자 난 나의 일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여기 뜰 거야.'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옮길 거야.'


생각해보면 이런 마인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플랏 메이트인 J에게서 소식이 들렸다.


"언니, 제가 일했던 카페 M(M이라고 칭하겠다.) 에서 사람 구한대요. 언니 혹시 생각 있으세요?"

"헐 대박. 진짜? 어어어 나 갈래 갈래."


약 1년 전 J가 런던에 왔을 무렵, 우리가 사는 집 근처에 카페M이 오픈을 했다. 그리고 J는 그 카페의 오픈 멤버가 되었다. 카페 M은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일본식 스타일의 카페. J는 그곳에서 7개월 정도 일을 했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거의 그만둬서 J도 그곳을 나왔다. (역시 일은 사람이 중요하지. 암 그렇고 말고.) 그곳에 계신 한국인 여자 매니저님이 J에게 연락을 한 거였고, 그 연락이 나에게 연결된 것이다. 이력서 한 장을 뽑아 가서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도로시(내 영어 이름)는 경력이 있으니까 들어와서 금방 일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왕 하는 거 슈퍼바이저 생각 있으세요? 아예 시급을 더 많이 올려서 슈퍼바이저로 일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인터뷰를 한 날, 그 매니저님의 말이었다. 그리고 트라이얼(*)을 갔다.


*트라이얼 : 인터뷰를 통과하면 급여를 받고 잠깐 동안 일을 해보는 것. employer는 employee가 실제로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최종 결정을 한다.


인터뷰 후 며칠이 지나 트라이얼을 하던 날, 이미 나는 카페M의 멤버로 결정이 된 상태였다. 일을 배우던 중 갑자기 매니저님은 말을 꺼내셨다.


"사실 저도 그만두어요. 그래서 도로시가 본격적으로 일할 때는 새로운 매니저가 올 거예요. 이렇게 알리게 돼서 미안해요."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뭔가 찜찜하지만... 일단 부딪혀보자, 고 생각했다.


2. 그 사이에 전에 일하던 카페에 떠난다는 notice를 남겼고, 떠나는 날 미련 없이 떠나겠노라, 무심하게 생각하며 일을 했다. 그러나 근무 마지막 날 나는... 무심하지 못했다. 그 전의 동료들이 그만둘 때는 무미건조하게 굿바이를 했는데... 나는 과분한 안녕 인사를 받고 말았다. 내가 떠나는 걸 알아버린 단골손님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려달라고 종이를 내밀었고, 그 중 아가들은 나와 인사하기 위해 일부러 마지막 날 카페에 왔다. 같이 사진도 찍으며, 몇몇의 손님들은 SNS를 알려주고.


매니저 Ange는 내가 텀블러가 필요하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카페 로고가 박힌 텀블러 하나를 건네어주었고, 동료들은 하나밖에 없는 카드를 만들어 그곳에 굿바이 인사를 남겼다.


나의 할머니 나의 애기들 우리들의 굿바이인사
동료들, 그들이 만들어 준 스페셜 카드



13개월 동안 내가 한 고생이 고생만은 아니라는 것. 언어가 잘 안되어도 진심은 통한다는 것.

울고 웃고 데이고 스트레스받고 땀을 흘려도 남는 건 사람과 애정이라는 것.

그런 것들이 마지막 날 내 마음을 흔들고 말았다. 고마웠다.


그 마지막을 뒤로하고, 난 새로운 일터인 카페M에 들어가게 되었다. 매니저가 바뀐 바람에 나는 다시 일을 배워야 했다. 그 전 매니저가 나에게 제안했던 슈퍼바이저 얘기는 사라져 버렸고, 난 팀 멤버로 시작하게 되었다. 어쨌든 일을 빨리 배워서 시급을 올려야겠다, 가 나의 다짐이었다. 팀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절반으로 이루어진 팀이었고, 바뀐 매니저는 내 또래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매니저와 나만 일을 했다. 매니저에게 처음 일을 배울 땐 괜찮았다. 매번 영어로 설명을 들어야 해서 답답했는데 한국어로 소통하니 얼마나 편하던지!


"도로시, 이건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

"네."


본격적으로 일을 한 첫날, 집에 돌아와서 나는 마음이 이상했다. 카페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일은 어렵지 않았고, 한국어로 소통하니 일하는 게 헷갈리지도 않았다. 주중이라 바쁘지도 않았고, 카페의 조용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나는 옮기기 전의 카페가 갑자기 그리웠다.


익숙하고 편한 곳이어서 그리운 거야.

괜히 마지막 인사가 따뜻해서 그리운 거야.

조금만 지나면 괜찮을 거야.


그런데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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