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잘 여문 과일 같은 소설
'19년 여름휴가 때 읽고 그 이후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으며 기분 좋아지는 소설. 정말 잘 쓴 소설은 내용이든 여운이든 그 나름의 아름다운 분위기이든 이미 아는 내용인데도 여러 번 다시 읽게 된다.
아래는 처음 읽고 난 후에 쓴 리뷰이다.
여름휴가를 가기 전에 책을 하나 빌려가려고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띈 책이 마쓰이에 마사시가 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라는 책이었다. 소개도 자세히 써 있지 않았는데 첫 페이지의 문장을 조금 읽어보니 느낌이 너무나 좋아 바로 빌려서 여행 때 들고갔다. 책방에도 도서관에도 책은 넘쳐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수없이 많지만 어딘지 제목도 문장도 다들 비슷하고 크게 끌리지도 않고 또 두 번을 읽게 되지도 않는다. 여타 다른 소비와 마찬가지로 책 시장도 이 시대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렇게 조금 읽어보고 느낌이 아주 좋았던 책조차 나에겐 참 오랜만이었다.
이 책은 일본의 건축설계사무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시대는 70~80년대로 좀 예전이고 주 배경은 일본 가루이자와에 위치한 여름 별장. 어떤 건축 장인과 그 밑에서 일하는 사무소 식구들의 이야기를 한 여름철에 맞추어 아름답고 서사적으로 써내려갔다. 문장이 매우 아름다운 작가라는 표현을 어디서 봤는데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아주 아름다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장도 내용도 차분하면서 향기롭다고 해야할까. 유럽과 일본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차분한 아름다움이었다. 은은하게 좋은 향이 풍겨오는 것 같은. 물론 그 아름다움은 문장의 표현 방식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야기의 배경과 내용에서 함축되어 풍겨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소설을 천천히 편안하게 음미하면서 읽었다. 참 오랜만이었다.
우연히 만났지만 이 책은 그 어떤 책보다도 여름 휴가에 어울리는 책이었다. 이번에 갔던 강릉은 묘하게 이 책의 분위기와 아주 흡사했다. 숙소의 한쪽 면은 사천 해변과 소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평화로운 논밭이 펼쳐지고 그 끝으로는 대관령의 산봉우리들이 부드럽게 솟아 있었다. 낮에도 밤에도 조용하고 자연의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일본 산골 마을의 여름 별장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나는 진짜 그곳으로 간 것만 같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곳과 이 책의 내용으로 나는 처음으로 마음이 깊게 휴식을 취하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
건축은 문화의 여러 종류 중에서도 우리의 삶과 매우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삶이 의식주로 크게 나뉜다고 하면 집은 그 중의 하나이면서 그 안에서 밥도 해먹고 잠도 자고 옷도 입기 때문에 결국엔 생활 문화의 종합세트 같은 분야인 것이다. 책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실제 여러 생활의 경험을 해보지 않은 건축가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할 수는 없는 거라고.
주인공인 건축가는 프랭크 로이트 라이드에게 사사받은 전후 일본 건축사의 거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는 건축가 사단과 주변 인물들은 매우 이상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후발국가로서 우리나라의 지식인 혹은 일반 사람들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선진문물인 것인지, 일방적인 사대주의인 것인지. 어느 정도로 받아들일 것이며, 그 와중에 내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이런 고민에 있어서 조금 더 빠르게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이룬 일본에도 참고할 만한 사례가 많은 것 같다. 실제로 일본은 다양한 분야가 많이 발달해 있고 서양의 문화나 지식도 우리나라보다 더 오래 그리고 깊게 퍼져 있는 것 같다. 평소 일본의 문화가 전반적으로 편하진 않지만 그래도 좀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의 전문가 정신과 자기 색깔 지키기였다.
이 책의 인물들도 그렇다. 건축 전문가이지만 이들은 엘리트 계층이 틀림없다. 이미 80년대 이전에 유학 혹은 서양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고 그래서 그곳의 문화에 친숙하다. 여러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건축계 또한 서양이 앞서간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일본의 아름다운 전원 속에서 그 땅과 의뢰인의 생활에 적합한 건축 설계에 매진한다. 일본 전통의 목조 건물로 지어진 건축사무소의 별장은 조용한 교외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서 간단한 농사도 짓고 마을 사람들과도 교류하며 이상적인 공동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이웃도 지인들도 모두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다. 그러나 오히려 매우 자연 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며 산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소설은 전반적으로 자연의 향기가 흠뻑 배어나온다. 자신의 분야에 열심히,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 충실하게, 인공적이기보다는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다양한 문화를 즐기며 사는 것과 과시적인 소비를 하면서 사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자신의 취향과 철학이 분명해야 하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서 왔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소설은 그래서인지 그렇게 허영기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건축이라는 전문 영역의 이야기 속에 부재료로 자연과 지리, 음식과 농작물, 생활 전반에 걸친 다양한 컨텐츠들이 잘 녹아 있다. 소박하지만 탄탄한 몸체에 작고 우아한 장식들이 달려 있는데 화려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편안하고 담백하다. 일본이 모두 그런건 아니겠지만 앞서 말했듯 본분을 잊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 충실하게 사는 특유의 장인정신은 가끔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소소하지만 백 년을 넘겨 물건을 파는 오래된 가게들. 번쩍거리는 패션 아이템이 아니지만 명품보다 아름다운 과자, 젓가락, 바구니, 양초 같은 생활 필수품을 파는 그런 가게들 말이다. 본질적인 행복은 사실 가장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부분에서 나오기 때문에 요즘을 사는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역시 작가의 문장력도 탁월했다. 이 책은 주제와 내용과 문장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좋은 작품이었다. 우연히 장소까지 잘 맞아 떨어져 그 효과가 배가되었지만 만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조용히 이 책을 읽었더라도 나는 반쯤 휴가를 다녀온 기분이었을 것 같다. 최근 커리어도 인간 관계도 황폐해진 직장에서 괴로워하는 나에게 이 책에 등장하는 여름 별장은 말 그대로 이상의 공동체와도 같았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세웠다는 탈리에신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이상 공동체를 꿈꾸기는 하나보다. 도대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가치관과 꿈을 가진 사람들과의 일터가 너무나 그립다. 성취가 크건 작건 사람에게는 그런 터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상쾌한 꿈을 꾸었지만 나에게는 이제 현실의 변화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