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길거리에서 한대의 자동차가 수신호 없이 내 앞에 끼어들려고 했다. 나는 말없이 비켜주었고 옆에 타고 있던 지인은 "웬일이래? 수신호 안 하면 절대 안 비켜주면서?" 그 한마디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 앞을 끼어든 녀석은 너무 나이를 먹은 녀석이었을까? 하얀 연기를 심하게 내뿜는 차였다. 연료저감장치를 달았으니 오해하지 말라는 스티커가 뒷유리창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차를 보면서 아직도 저 차를 타는 사람이 있나?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나이 20살, 고3 생일 지나고 면허를 바로 딴 나의 첫 차는 푸조 컨버터블이었다.
17살 때부터 신발 장사를 시작으로 제법 돈을 모아 졸업 후 학교 다니면서 창업한 쇼핑몰도 나름 선방하고, 새벽이슬 맞으며 동대문을 돌아다닌 보람이 가득하던 참 철없던 20대 초반. 부모님 도움 없이 산 첫 차는 나에게 뿌듯함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면서 교만함이 가득했던 시기. 어찌 보면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시련은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고 그렇게 내 첫차는 나를 떠나갔다.(지금 돌이켜 보면 참 대단한 차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차였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름 철이 들고 한창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시기 사업은 망했고 쥐꼬리만큼 생기는 돈은 빚 갚는데 다 쓰다 보니 내 지갑에는 정말 먼지만 날렸다.
돈을 벌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 상황.
그때 중고차를 하던 친한 형님이 "나도 지금 당장 먹고살기 힘들어서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이거 일단 가져가고 천천히 돈 벌어서 갚아"라고 하며 선금도 없이 키를 던져주었는데 포물선을 그리며 나에 손으로 골인하던 차 키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싼타페 1세대. 350만 원짜리 중고차였다.
이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정말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며 빚도 갚고 차곡차곡 돈을 불려 나갔고 나는 다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아마 철없던 20대 초반이었다면 돈 좀 다시 벌게 되었을 때 어깨에 힘주고 싶고 망했을 때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차부터 좋은 녀석으로 뽑았을 텐데 정말 많은 자동차를 타면서 한 번도 별명을 지어준 적이 없었던 내가 별명까지 지어주면서 탔으니 당시 나에게는 지금의 S클래스나 우르스 못지않은 슈퍼카였던 기억이 있다.
내가 이 녀석을 얼마나 아끼며 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40도가 육박하는 여름 날씨에 에어컨이 고장 났음에도, 나이가 먹어 하부가 썩어서 차체가 휘었을 때도 나 자신과 한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차를 바꿀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도 나를 너무 좋아했는지 아내와 아가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은 이제 그만 떠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며 나에게 신호를 보내주었다. 결국 나는 이 녀석을 떠나보내주기로 마음먹었고 처음으로 이 차를 폐차장에 보내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아이 기저귀 값 보태라고 20만 원이나 내 손에 쥐어주고 떠난 너.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던 가끔 길에서 이 차를 보면 그렇게 한없이 반갑다. 수신호 넣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내 앞을 내주지 않는 나지만 이 차는 말 없이 비켜준다. 내 첫차보다 더 좋아했고 사랑했던 녀석이니까........
정말 진심으로 고마웠어.
네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테니까.